우 현 보

[ 1333(충숙왕 복위 2) - 1400(태조 9) ]

파란만장(波瀾萬丈)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양호당(養浩堂)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살아서 얼마나 환호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비통하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세상을 뜬 지 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느꼈을 영욕(榮辱)은 아직 삭혀지지 않았을 것만 같다.

고려 말 최고의 명문가로 한산 이씨와 단양 우씨를 꼽을 수 있다.

한산 이씨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부자(父子)가 중국에서 연달아 급제하면서 문명(文名)을 떨친 집안이다.

단양 우씨는 우탁(禹倬)이 두각을 보였고,

우현보에 이르러 아들 5형제가 모두 급제하면서 고려 말의 막강한 문벌이 됐다.

두문동 72현을 꼽을 때, 구성 인원이 다른 두 개의 명단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정몽주를,

다른 하나는 우현보를 앞장세운다.

우현보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인(三仁)으로 꼽힌다.

이색, 정몽주, 길재로 구성된 고려 말 삼은(三隱)이 후대의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라면,

삼인은 당대의 세력 구도와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초의 문신인 우현보(1333-1400)의 자는 양세당(養洗堂) 이고,

호는 원공(原功)이며, 본관은 단양이다.

우현보는 고려시대 1355년(공민왕 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사의 대부에 까지 이르렀고 단양부원군까지 되었지만,

고려가 멸망하자

항상 그는 한 나라의 임금만을 섬기지 못하였음을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늘 죄지은 듯한 슬픔과 불안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백성만을 위한 바른 행정을 펴 나가는 데 온힘을 쏟았다.

조선 태종 임금은

우현보가 친구로서 청렴결백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곧은 성품인 것을 알아

단양백으로 승진시킨 후,

다시 그에게 좌명공신 및 청백 (淸白)의 호를 하사하였으나

우현보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사양하며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은 그가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옛날의 다정한 친구로 다시 돌아가 왕의 제복을 벗고,

평범하고 소박한 옷차림으로 만나 보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인 우현보가 대궐에 들어오면

태종 임금 자신이 중문 밖까지 친히 나와서 전송을 하는 등 갖가지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태종 임금께서 친절을 베풀면 베풀수록 우현보는 더욱 마음이 언짢았으며,

불안스럽고 불편하며, 자신이 더더욱 부끄럽기만 하였다.

태종 임금이 자신에게 너무 마음을 두는 것이 오히려

고려말에 한 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못한 비굴함과 죄스러움만을 부추길 뿐이라고

우현보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자신이 관직에서 물러남이 옳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는 관직을 훌훌 정리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늘 청렴결백하여 그가 입는 의복은 사시사철 때에 따라 갈아입을 옷이 없어

남루한 옷을 일년내내 입고 살아갔다.

조석으로 호박범벅이나 죽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콩을 삶아 만든 콩죽을 끓여 먹는 것이 예사였으며,

산과 들에서 나는 나물을 뜯어 다가 나물밥이나 나물을 섞어 만든 떡을 해 먹고 살아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우현보를 두 상공(豆 相公)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며 손자들 중에는 정승 자리까지 차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손들은

이씨 조선에서 받은 녹미(祿米)가 불명예스럽다고 여기는 대쪽 같은 아버지를

모실 수가 없었다.

우현보는 늘 자손들에게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 하였다.

"나는 망국의 대부이다.

하늘과 땅에까지도 죄를 지은 몸이니 내가 죽으면

우리 가문의 어른들이 잠들고 계신 선영에 묻지 말아다오.

또한 우리내외도 같이 합장시켜서도 아니되며

내 무덤 옆에 단 한사람의 자손도 가까이 묻지 말고,

내 스스로 평소에 자신을 죄인처럼 여기다 죽어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주려므나."

라는 말을 자주하였다.

이처럼 우현보는 고려말기의 한 임금만을 섬기려다 이방원에게 황해도 개성 에 있는

선죽교에서 타살된 포은 정몽주와 같은 일편단심을 가진 사람으로

우현보 자신은 그처럼 죽지 못한 것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그의 뇌리에 늘 파고 들어 떳떳이 살지를 못했다.

우현보의 성품은 항상 검소하고 청렴결백하여,

오직 한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려는 일편단심이었으며,

절개가 곧고 강직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야사에서도 전해 오고 있다.

또한 부모와 웃어른에 대한 예우도 극진하였다.

우현보의 일편단심의 곧은 절개와 충정어린 마음은

멋 훗날까지 우리 후손들 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우현보의 집안에서 크게 이름을 얻은 인물은 시조 우현(禹玄)의 8세손인 역동(易東) 우탁이다.

그는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상소를 할 만큼 결기 있는 선비였고,

작가가 분명한 우리말 노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 ‘탄로가’를 지은 시인이었다.

또한 역학(易學)에도 뛰어나 ‘역동(易東)’이라 불린 성리학자였으며,

훗날 퇴계 이황이 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워 추앙했을 정도로 후대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우탁에게 늦도록 아들이 없어 들인 양자가 우길생(禹吉生)이다.

그는 나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숭록대부(三重大匡崇祿大夫)에 올랐고 적성군에 봉해졌는데, 특히 정몽주가 일찍이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우길생의 아들이 우현보다. 우현보가 10세 때에 우탁이 세상을 떠났으니,

우현보는 할아버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현보는 1333년에 태어나 135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상례(喪禮)를 삼년상으로 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유학 증진, 의관(衣冠) 제도 확립 등에 힘썼다.

안향에서 우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

우현보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5형제,

홍수(洪壽)·홍부(洪富)·홍강(洪康)·홍득(洪得)·홍명(洪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國事)를 논할 정도였다.

더욱이 큰손자인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왕실과 튼튼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씨 집안은 성리학 정착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 집안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으로 왕의 비호를 받는 집안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비극이 찾아온 것은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부터다.

참살된 정몽주의 시신을 거둬준 이가 바로 우현보였다.

우현보는 계림(경주)으로 유배당하고,

아들 5형제도 뿔뿔이 유배를 당했다.

그해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내쫓기던 날,

우성범은 개성 남문 밖에서 공개 참살되고,

조선 개국이 선포된 뒤에는 유배지에 있던 첫째 홍수,

넷째 홍득, 다섯째 홍명이 장살(杖殺·곤장을 맞고 살해)됐다.

곤장을 많이 맞으면 장독이 올라 죽는 수도 있지만,

사형(死刑)이 따로 있었으니 죽지 않을 만큼 때리는 게 장형(杖刑)이다.

그런데 세 형제가 죽음에 이른 것은 죄다

정도전(鄭道傳)의 사주로 빚어진 일이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원수이자 집안의 원수인 조선에 우현보가 돌연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왜일까?

이는 우현보와 이방원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때 우현보가 시험관을 맡았다.

당시 급제자들은 자신을 입신시켜 준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칭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보다도 더 강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 같은 인연이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홍부와 셋째 아들 홍강은 원종공신이 돼

우씨 집안은 정치적인 재기를 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우현보는 고려가 무너진 뒤 은거하면서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

파란만장한 삶 끝에 이른 우현보의 심정이 담긴 말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망국(亡國)의 대부다.

나를 선영에 묻지도 말고, 또한 자손들도 이곳에 묻지 말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휴전선 너머 장단 고현(古縣)에 있다.

Posted by 9br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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