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대(禹仲大)

1229년(고종16) 향공 진사(鄕貢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 문하시중(門下侍中)우중대(禹仲大)는

단양우씨(丹陽禹氏)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

그의 아들

천규(天珪 시중(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

천계(天啓)ㆍ

천석(天錫 시중(侍中))ㆍ

천우(天佑)ㆍ

천성(天成)등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들 5형제중 맏이인 천규(天珪)의 아들이 바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이다.

중시조묘(中始祖墓): 시중(侍中) 우중대(禹仲大)墓(忠北 丹陽郡 積城面 乂谷里)

비(碑) 시중(侍中) 우중대(禹仲大)墓碑

丹陽禹氏 千年의 빛과 그림자 第29世孫 芝巖 禹在忠

우중대(禹仲大)

高麗朝와 禹氏 (西紀1000년-)

倬할아버지 이전에도 禹氏일문은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 1247-1308)를 전후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조선개국(朝鮮開國) 직전까지 번영을 누렸다.

고려 고종(高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 때 국정을 총괄하던 대신, 지금의 수상)을 지낸 중대(仲大)할아버지는 단양 우씨를 명문(名門)의 반열(班列: 신분)에 올려놓은 최초의 어른이시다.

이 당시의 사회계급은 상류(上流), 중류(中流), 하류(下流) 및 천류(賤流)로 나뉘어져 상류, 중류는 지배계급(支配階級: 대개 지식층)에 속하고

하류, 천류는 피지배계급(被支配階級)에 속했다.

그중 상류계급은 왕족이나 품관(品官: 품계를 가진 관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 이상의 문무양반과 그 자손을 포함한 중앙배경(中央背景)의 귀족군(貴族群)과 또 지방배경의 토호군(土豪群)이 이에 해당되었다.

현(玄) 시조(始祖)의 6세손인 중대(仲大)할아버지는 1229[고종 16]년

향공진사(鄕貢進士: 지방장관의 천거를 받아 진사시험을 보는 사람)로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고려중엽 후의 명신으로

묘(墓)는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있고 단양 사람들이 그 묘를 높혀 우령공묘(禹令公墓)라 부르니 나무꾼이 감히 가까이 못 갈 뿐 아니라

그 지방의 유사시에는 할아버지를 제사모셔 신명에게 축을 비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유덕에 감복하는 바가 실로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세덕고(世德考: 선조 중에서 특히 영현(英賢)한 분들의 덕과 업적을 기록)에 중대(仲大)할아버지에 관한 글이 있어 다음과 같이 옮겨 놓는다.

<고려 고종 16 기축년에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판서 정실(鄭實)이 찬갈음기(撰碣陰記)에 가로되 단양읍 북쪽 애곡간좌(艾谷艮坐)에 큰 묘가 있으니 곧 고려 문하시중 禹公의 묘소이다.

禹氏는 동국(東國: 조선의 별칭)의 대성(大姓)이 되어 본군(本郡) 이름으로 본관(本貫)을 삼았다.

왈(曰)賢符, 왈(曰)相登, 왈(曰)元齡이 있어서 모두 장원급제로 고려문조(高麗文朝)에 이름이 드러났으나 족보에 찾을 길이 없고 휘(諱)玄, 휘(諱)臣, 휘(諱)仁可, 휘(諱)仍順, 휘(諱)慶節 5세(五世)가 숭정보본 (崇楨譜本)에 기재되어있으나

연대가너무 멀어서 관함(官啣)과 묘소가 지금와서 확실치 못하고 오직 시중공(侍中公)만이 벼슬이 당시에 가장 높고 이름이 후세에 전해졌다.

퇴계 이선생이 손수 禹氏족보를 쓰셔서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보장(保藏)하였는데 특히 시중공으로 시조(始祖)를 하였으니

이로부터 세대(世代)와 원류(源流)가 분명하여 가히 상고(詳考: 자세히 참고)할 수 있었다.

공(公)은 향공진사로 봉작(封爵)이 상공(相公: 재상의 경칭)까지 이르러서 고려 중엽 후의 명신(名臣)이 되셨다.

단양 사람들이 그 묘를 높이어 말하기를 우령공묘소(禹令公墓所)라 하여 개간하고 나무하는 사람들도 감히 곁에 가지 못 하였다.

마을에 일이 있을 때는 향선생(鄕先生: 벼슬 후 향리에 돌아가 향학선생이 된 사람)께 제사 지내는 의(義)를 따라 제사하여 신명(神明)처럼 여기니 공(公)의 유덕(遺德)이 사람에게 미침이 큼을 가히 알 수 있겠다.

부인 임씨(林氏)는 판서(判書) 성박(成璞)의 여(女)이다. 5자를 생(生)하였는데 모두 문과급제(文科及第)에 오르셨다.


天珪는 남성전소(南省典書)요,

天啓는 판서(判書)요,

天錫은 시중(侍中)이오,

天佑는 군기윤(軍器尹)이요,

天成은 낭장(郎將)이라.

天珪 생의 倬은 제주(祭酒) 문희공(文僖公)이시니 퇴계 이선생이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 추존(推尊: 추앙하여 존경함)하셨다.

天錫 생의 칭 좌대언(左代言)과 팽 시중(侍中)하고

倬 생의 元光 문과(文科)와 元明 문과(文科)하고

칭 생의 吉生 적성군(赤城君)과 國珍 참판(參判)하고

팽 생의 壽生 전객령(典客 令)과 德生호군(護軍)과 福生시중(侍中) 小生과 祿生이다. 현손(玄孫)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으나

특히 단양백 충정공(丹陽伯忠靖公) 玄寶와

좌정승 정평공(左政丞靖平公) 仁烈과

전서 문숙공(典書文肅公) 希烈과 판서(判書) 洪壽 와

예안군(禮安君) 洪富와

대사헌(大司憲) 洪康과

집의(執義) 洪得과

판서(判書) 洪命과

제학(提學) 孝剛과

부마 단양군(駙馬丹陽君) 成範과

제학(提學) 承範과

단양군 공 관찰사(丹陽君貢觀察使) 상과 판서(判書) 孟善과

관찰사(觀察使) 伏龍과 대사성(大司成) 成傳과

正字 弘績과 통제사(統制使) 致績과 유수(留守) 昌績이니

이가 그 명위(名位)가 가장 나타난 자(者)들이다.

외파(外派)도 또한 혁혁(赫赫)히 빛나서 여러번 사록(沙麓)의 상서(祥瑞: 길한 조짐)를 받았으니 관저(關雎)와 덕화(德化: 덕행으로 남을 감화시킴)에 기인(基因)함이다.

이 모두가 공(公)의 어진 덕으로 경사(慶事)로움이 더욱 멀어 질 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다.

뒤를 이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모아 봉분(封墳)을 짓고 비석을 세워 영구함을 꾀할 세 진사(進士) 楨龍 과 기제좌랑(其弟佐郞) 楨鳳이

나에게 일언의 기록을 부탁하매 내가 생각하건대 세교(世敎:사회의 풍교)가 쇠퇴(衰退)하였고 조상에 보답하는 성의가 없는 이때에도 오직 공의 후손들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아니하고 같이 와서 각기 재력을 출판(出辦: 일을 힘써 주선함)하여 이 일을 도우니 이를 보아도 또한 공(公)의 가르침이 오래 오래 생생(生生)하여 지금와서 그 보답(報答)함을 누리는 것이다. 아 성 하도다. 내가 공(公)의 외예(外裔)로 감히 사양치 못하고 대략 여기에 글을써서 비석에 새기게 하노라.>

영춘(永春: 단양군에 있음) 북쪽 벽에는 할아버지가 지은 시가 있다.

昨登寧越峽 어제는 영월협곡에 오르더니

今下永城灘 오늘은 영성여울 밑에 있어라

一水決千里 천리강물이 단숨에 흐르니

片舟過萬山 쪼각배는 이미 만산을 지나누나

<해설> 작일(昨日)에는 영해산(寧海山)에 올랐더니 금일(今日)에는 영성(永城)물가에 왔더라 한 물이 천리(千里)를 흐름에 조각배가 만산(萬山)을 지났더라.

Posted by 9br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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