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우씨 우탁선생

소재지 : 적성면 품달천 출생

우탁은 단양에서 난 고려 문신으로서 단양에 많은 일화와 설화가 전해 온다.

자는 천장. 탁보, 호는 역동, 익호는 문희, 본관은 단양이다.

고려원종 4년(1263년) 출생하여 충해왕 3년(1342년) 세상을 떠났다.

우탁선생이 탄생해서 3일부터 울기 시작하여 집안과 마을 사람들은

아기가 잘못 되었다고 수군거렸는데 노인 승이 지나가기에 물어보았더니

" 그 녀석 벌써부터 주역을 외우고 있구만. 큰 인물이요. "

하면서 지나간 후 보름후 부터는 울지않고 정상으로 자랐다는 설화가 전한다.

금수산의 정기를 받은 선생은 고려 충열왕 16년(12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사록(정8품) 37세때는(1308년) 감찰규정 재직시

선왕의 후궁과 가까이 지냄에

흰옷에 도끼를 메고 왕앞에 나가 상소하니

신하들이 왕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아무도 읽지 못하자

" 경이 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그릇된 점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지금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 "

고 하자 신하들이 놀라서 벌벌 떨고 왕이 부끄러워 했다.

그후 벼슬을 버리고 안동군 예안현 지삼리에 은거했다.

정부에서 불러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했다.

선생은 經史에 능하여 따를자가 없었고 易學에 깊었으며

程朱學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때 아는자가 없어

선생이 연구 해독하여 제자를 가르치니 성리학이다.

정4품인 사인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상에 힘쓴곳이라 현재도 마을 이름이 사인암리이다.

특히 역학에 대한 깊은 지식은 중국의 왕도 인정하였다 한다.

중국의 학자들과 토론할때 모든 중국인들이 감탄하여 易을 東으로 옮겨갔다고 감탄하여

후세 학자들이 선생을 역동선생이라 불렀다.

선생의 묘는 안동 정정리에 있고 적성면 하리와 대강면 사인암리에 유허비가 있고 애곡리에는 사당이 있다.

우탁 자는 천장, 시호는 문희, 본관은 단양이다.

단양에서 태어났으며,

1290년 영행사록으로 있을 때 민심을 현혹하는 요신의 사당을 없애고,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는 충선왕의 비행을 간하다가 듣지 않으므로 관직을 물러나

예안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마을을 도학, 예의, 절조의 세가지를 가르친 곳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지삼리라고 불렀다.

충숙왕이 등극하여 선생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누차 불렀으나 거절하고, 글을 벗삼았다.

후에 성균관 제주직을 맡아 후진을 가르쳤다.

이때 송나라 정자의 학이 들어오자 이를 아무도 해득치 못하므로 선생은 문을 닫고 들어앉아 한달간 연구하여 해득하여 후학들에게 가르치니 이는 우리 나라 이학의 시초였다.

시조에도 조예가 깊어 늙음을 한탄한 시조 두 수가 전한다.

여든 한 살로 세상을 떠나니 무덤은 안동군 예안면 정정리에 있다.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 호(號)의 내력

제보자 : 적성면 하리 360번지 장진만

제보자 : 김 동 식

적성면 하리 일대에는 품달촌(品達村) 다시 말해서 큰 인물이 난다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인물중에 고려시대에 우탁 선생을 들수가 있습니다.

우탁 선생은 고려 원종(元宗) 4년(1263년)에 출생하여 24살 때인 1290년(충렬왕 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가록에 선임되었는데

郡에 요괴한 신사(紳祠)가 있어 이름을 팔영(八鈴)이라 하는데

백성들이 현혹되는 것을 보고 묘사를 철폐하고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1308년(忠宣王 즉위)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자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에 입궐하여 상소(上疏)하니

신하가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경(卿)은 그 죄를 아느냐?"하고 말하니

대신들이 어쩔줄 모르고 말문도 못열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예안(지금의 안동부근)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았다.

그 후 충숙왕 때,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다시 불러 중용하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우탁 선생은 경사에 정통하고 역학(易學)에 깊으니

정주학(程朱學)이 처음 우리 나라에 들어왔으나

이것을 아는 사람이 없자 한달 동안 문을 닫고 연구하여 이를 해득하고

후진을 가르치니 성리학(性理學)이 비로소 행하게 되었다.

이 어려운 성리학을 해득하여 정리하게 되자

중국에 여러 학자들이 중국의 易이 이제는 東으로 가게 되었다하여 후에 사람들이 선생을 역동(易東)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탁(禹倬)1 1263(원종 4)∼1342(충혜왕 복위 3).

고려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현(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천규(天珪)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름하는 신사(神祠)가 있어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하였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하여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특히, 정이(程)가 주석한 《역경》의 〈정전 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 만에 터득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고려사》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당하였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하나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우탁선생이 풍류를 즐기던 사인암

푸르고 깊은 계류를 끼고 수백척의 기암절벽이 하늘높이 치솟아 있으며 암상에는

노송까지 곁들여 마치 해금상을 연상케 하며 굽이굽이 감도는 그 일대는

운선구곡의 신비경이 펼쳐있다.

고려말 경사와 역학에 능통했던 유학자이며 단양태생인 역동 우탁선생이

정4품이었던 사인벼슬 재직시 이곳에서 청유하였다는 사연에

딸 조선성종대 단양군수 임재광이 명명했으며 암벽에는

"탁루불군 확호불발 독립불구 돈세무민"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것이 아니며 확실하게 빼지못한다 홀로서도 두려운 것이 없고 세상에 은둥하여도 근심함이 없다.)

라는 우탁선생의 친필각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1977년 지방유림들이 건립한 '역동우탁기적비'가 있다.

가까운 곳에 도락산과 소백산 관광목장 그리고 유황온천이 있어 쾌적한 관광코스로 가광 받는 곳이다.

상현록(尙賢錄)

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 우탁(禹倬)의 사적을 기록한 책. 2권 1책. 목판본. 후손인 사덕(師德),홍택(弘澤) 등이 편집하고, 택준(宅準), 종기(鍾璣) 등이 1871년(고종 8)에 누락된 내용을 보완, 간행하였다.

권1에 시, 유사, 제가증시(諸家贈詩), 권2에 사적, 기, 축문,봉안문, 제문, 상량문 등, 속집에는 세계도(世系圖), 유묵, 유사, 고유문, 묘갈명, 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역동문집(易東文集)

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 우탁(禹倬)의 시문집.

상하권 2책. 활자본.

1881년(고종 18) 후손 규영(圭榮)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인섭(金麟燮),윤정현(尹定鉉)의 서문과 권말에 규영의 발문이 있다.

책머리에 단양우씨명현록(丹陽禹氏名賢錄)이라 하여

시중령공사적(侍中令公事蹟) 1편이 있고, 이어 ≪역동문집≫이 있다.

등과홍패(登科紅牌) 1편, 시 3수, 필적(筆蹟) 1편, 동국사전(東國史傳) 2편,

열성조포양록(列聖朝褒揚錄), 동국제현찬양록(東國諸賢遡揚錄),

역동서원사적(易東書院事蹟) 기(記) 각 1편, 서원사적(書院事蹟) 3편,

의(議), 청문묘종향소(請文廟從享疏) 각 2편, 유지(遺趾), 묘소(墓所),

적성군사적(赤城君事蹟) 각 1편,

양호당문집(養浩堂文集) 상하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저자의 작품은 〈제영호루 題暎湖樓〉,잔월 殘月〉,〈사인암즉경 舍人巖卽景〉 등 시 3수뿐이다.

시운이 청아, 고결하여 고려 때의 문아(文雅)를 맛보게 하는 작품이다.

〈동국사전〉은 ≪여사 麗史≫본전(本傳),≪동국통감≫,≪동사 東史≫열전(列傳),≪패사 稗史≫ 등에서 저자와 관련된 사실을 발췌한 것이다.

〈열성조포양록〉은 태조,태종,명종,선조,효종,숙종,영조,정조 등 역대왕으로부터 받은 은전(恩典)을 기록한 것이다.

〈동국제현찬양록〉은 ≪퇴계선생언행록 退溪先生言行錄≫,≪논사록 論思錄≫,≪화담집 花潭集≫ 등에서 저자에 관해 언급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서원사적〉은 저자를 봉안한

예안의 역동서원(易東書院),

단양의 단암서원(丹巖書院),

안동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봉안된 기록을 전재한 것이다.

〈청문묘종향소〉는 1810년(순조 10)과 이듬 해에 유생 송환보(宋煥普), 박기호(朴基染) 등이 저자의 문묘 종사를 청한 상소문이다.

장서각도서에 있으나 하권이 결본이다.

탄로가(嘆老歌)

고려 말에 우탁(禹倬)이 지은 시조.

歎老歌(탄로가)로 표기하기도 한다.

모두 3수로 늙음을 한탄한 주제를 담고 있다.

작자가 충선왕의 패륜을 극간하다가 진노를 입어 예안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며,

새로 들어온 주자학을 연구하다 보니 어느덧 백발이 되어 인생의 늙음을 안타까워하여 읊은 것이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로 시작되는 작품은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처절하게 노래하였고,

춘산에 눈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로 시작되는 작품은 자연의 힘을 빌려 인간의 삶을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봄바람이 눈덮인 산을 녹이듯 자연의 위대한 힘을 빌려 인간에게 찾아오는 백발을 없애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았다.

"늙지 말려이고 다시 젊어 보려터니"로 시작되는 작품은 늙지 않고 젊어보려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찾아드는 백발은 어쩌지 못하고 젊은 여인을 탐하는 자신의 인간적 욕구를 "이따금 꽃밭을 지날 제면 죄지은 듯 하여라."라고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죄책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늙음을 가져오는 자연의 질서에 맞서보려는 안간힘과 죄책감이 인간미를 더해주고 있다.

Posted by 9br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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