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우씨의 내력 각 파조의 내력

1.득성( 성씨의 취득)

한국의 성은 서기 350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고구려,신라,백제,때는 일부사람들만이 사용 하였다.

예로 신라의 박,진,김,이,최,정,손,배,사, 9성이 일부제한된 귀족에게만 사용되었다.

고려문종(1055)에 이르러

과거응시의 요건으로 성씨가 필요하게 되자 이떄부터 성씨가 보편화되었으며

평민층급에는 득성을 용인하지 않았다.

우리단양우씨는 그 근원이 오래되어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시조(현)는 고려태조때 분으로(928-1035 ??)

일반적 득성시대보다 백년이 앞서 득성하였다고 보며 일설 중국에서 유입운운은 고증할 만한 기록이 없다.

시조

(현)할아버지(928-1035)

향진사 정조호장

부인은 평산신씨숭보의 녀로 평산신씨족보에 기재되어있다.

2세

(신) 할아버지 (970-1066)

전법령

3세

(인가) 할아버지(1026-1120)

양주목사

4세

(잉순) 할아버지

관찰사

5세

(경절) 할아버지 (1172-1253)

지도평의사사

이상5대는 타성의 예와 같이 구전등으로 전래되어 온 기록인 바 불확실함

6세

(중대) 할아버지 상령공, 중시조

문과에 급제 관은 문하시중

(대동원부군옥)에 수록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시대의 수상직. 중서문하성의 장관으로 품계는 종1품, 정원은 1명이었다.

문하시중-고려 때 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종 1품 관직.

1275년(충렬왕 1)에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병합하여 첨의부로 고쳤으므로 중서령은 폐지되고, 문하시중 대신 좌·우첨의중찬(左,右僉議中贊) 각1명씩 두었다. 1308년 첨의부가 도첨의부로 됨에 따라 정승이라고 불렀다. 1369년(공민왕 18)도첨의부가 문하부로 고쳐지자 문하좌시중·문하우시중으로 불렀으며, 창왕때는 시중·수시중으로 불렀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 문하시중(門下侍中)우중대(禹仲大)는 단양우씨(丹陽禹氏)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

중대 할아버지의 아들

천규(天珪 시중(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

천계(天啓)ㆍ

천석(天錫 시중(侍中))ㆍ

천우(天佑)ㆍ

천성(天成)등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들 5형제중 맏이인 천규(天珪)의 아들이 바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이다.

우중대(禹仲大)할아버지의 맏아들인 우천규(禹天珪)할아버지(1253[고종 40]년)는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문하시중의 다음 벼슬)를,

둘째 아들 우천계(禹天啓)할아버지는 판서(判書: 고려 때 각 관청 및 6조(六曹)의 으뜸벼슬로 정2품 관직),

셋째 우천석(禹天錫)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 등

우천우(禹天佑)(군기윤 軍器尹),

우천성(禹天成)(낭장 郎將)할아버지을 포함한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모두 지금의 장관급이상으로 입신 출세하여 가문을 빛냈다.

이들 5형제 중 맏이인 우천규(禹天珪)할아버지의 아들이 바로 탁(倬)할아버지이다.

고려조(高麗朝)는 이 무렵 안으로는 왕권(王權)의 쇠미(衰微)로 정치적 변란( 變亂)이 여러번 일어나고 밖으로는 몽고의 외환(外患)으로 환난(患難)이 극에 달해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고려조는 부득이 1259[고종 46]년 몽고와 강화(講和)를 맺게 된다.

7세

(천규)할아버지 상령공 제일자

남성전서 문하시중 동평장사

휘(천계) 상령공 제2자

(천계) 할아버지 상령공 제 2 자

우천계(禹天啓)할아버지는 판서(判書: 고려 때 각 관청 및 6조(六曹)의 으뜸벼슬로 정2품 관직)

(천석)할아버지 상령공 제3자

우천석(禹天錫)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묘는충주산척 충북중원군산척면송강리

1980년 묘비개편

우천석 할아버지의 묘는 송강리 행정마을에 있다. 묘의 면적은 약 50여평 정도이고 묘는 네모형태의 방형분이다.

돌을 다듬어 4-5단을 쌓아 네모난 형태의 호석을 두르고 있는데 호석은 높이가 앞면이 90cm이며 뒤로 가면서 산의 경사면 때문에 낮아져 50cm정도이고 뒤로는 흙으로 연결되고 있다.

석물은 상석 일체와 상석의 좌측에 옛날 묘표(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諱天錫之墓)가 있고 우측에는 1980년에 세운 새로운 묘비(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之墓)가 있으며 묘비 앞에 문인석이 있다.

우평 묘

우천석 할아버지묘 바로 뒤에는 우천석 할아버지의 아들 우평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데 조성 양식이 우천석 할아버지의 묘와 동일하며 〈고려밀직부사추봉시중사우공평지묘〉란 옛 묘비와 1980년에 세운〈문하시중평장사단양우공지묘 배군부인 청풍김씨합 부〉라 새겨진 묘비가 있다.

묘소 입구에는 천등재(天登齋)란 사당과 숭덕문(崇德門)이라는 출입문이 있고 사당 바로 좌측에 1982년에 세운 단양우씨제단비가 있다.

충주시내에서 목행대교를 지나 직진하다 보면 영덕삼거리가 나오고 제천방향으로 조금 가면 산척면 소재지가 나온다.

산척농협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가다보면 길 왼쪽으로 손순효 신도비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바로 세 갈래 길이 나온다. 가운데 길로 500m 쯤 가면 왼쪽 산 중턱에 우천석 할아버지의 묘가 잘 보인다.

(천우)할아버지 상령공 제4자

우천우(禹天佑) (군기윤 軍器尹)

(천성)할아버지 상령공 제5자

우천성(禹天成) (낭장 郎將)

8세

(탁)할아버지 (1262-1342) 탁부 (천규)의 자

호는 역동선생,백운,단암,익호는 문희공

우리 단양우씨조상중의 가장 뛰어난 명저상으로 고려조의 석학이다.

진사(鄕貢進士)인 우천규 할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다.

주역을 도입교수하시어 동방이학의 비조로 추앙받고 유림에서 존중 숭배 되다.

관은 성균관제주 진현관직제학

감찰순정으로 충선왕의 실덕을 충련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비항은 배종호박사저(역동우탁선생고실)참조

휘 (칭) 휘 (천석) 의 장자

문과 관은 좌대언

휘 (평) 휘 천석의 제 2자

봉익부부 밀직사부사 상호군 추봉문하시중

9세

(길생)할아버지

(칭)할아버지의 장자 호천숙

(탁)할아버지 하로 출계하여 종통을 이음

적성부원군 관은 판서운관사

서성재보작공2등

참의공파의 파조

휘(원광) 휘 (탁)의 자

예조참의

조선초기의 관리, 본관은 단양(丹陽).
8세손 문희공 탁의 자, 관직은 예조참의
(參議)

봉상정공파의 파조

휘 (원명) 휘 (탁)의 자

봉상정

조선초기의 관리, 본관은 단양(丹陽).
8세손 문희공 탁의 자, 관직은 봉상정
(奉常正)

문강공파의 파조

휘 (국진) 휘 (칭)의 2자

참판,일운 사조판서 익호는 문강공

公이 고려말에 태어나셔서 문과에 급제하시고 참판을 거쳐 의금부 판사,

그리고 이조판서를 지내셨다.

문행록을 대략적으로 보면 충심으로 임금을 섬기고 명을 의로서 관계를 지속하였으며 유교와 불교를 엄 중히 지킬 것은 지키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이 그게 바로 올바른 道 라고 하셨다.

外史氏 찬성하여 말하기를 백이와 숙제의 오상고절한 뜻(夷齊之志)과 야음과 목음의 빼어난 학행(冶牧之學)이라 하여 그 뜻을 높이 사셨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문강공 국진祖를 派祖로 모시고 제향을 피웠다

휘(복생) 휘 (평)의 제3자

관은 상호군 추봉 문하시중

10세

휘(현보) 휘 (길생)의 자(1333-1400)

자는 (원공) 호는 양호당,독락당,익호는 충정공

관은 문하시중,단양부원군,순충익재좌리공신,청백사,

우씨문중에서 역동이 도학군자로 학문에만 치중한데 비해

현보 할아버지는은 고려말 이조초의 정변의 과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하고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묘소 개성 장단군장단면

1980년 파주군파평면두포리 망제단건립

1333(충숙왕 복위 2)~1400(정종 2). 고려말 조선 초의 정치가 자는 원공(原功),

시호는 충정(忠靖). 본관은 단양(丹陽). 55년(공민왕 4) 문과(文科)에 급제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

집의(執義) .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우왕 때 밀직대언(密直代言) 제학(提學) .

동지밀직사사 겸 대사헌 . 정당문학(政堂文學)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역임했다.

88년(우왕 14) 다시 찬성사가 되어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해 요동정벌(遼東征伐) 때는 경성 유수(京城留守)로 남아 있었고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한 뒤 좌시중(左侍中)으로 있다가 곧 파직,

뒤에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으로 봉해졌다. 90년(공양왕 2)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있다가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 원배(遠配),

이어 석방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철원에 유배, 곧 풀려나와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개봉(改封)되었다. 92년(공양왕 4)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해 다시 원배(遠配), 이어 풀려 나왔으나 이 해 조선이개국되자 또 광주(光州)에 유배, 이듬해 석방되었다.

98년(태조 7) 복관(復官)되고, 이듬해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으며,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 내(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듣고 이를 방원(芳遠)에게 알린 공으로 난이 평정된 뒤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이 되었다

정평공파의 파

휘(인열) 휘(복생)의 장자 (1337-1403)

의정부좌정영,익호는 정평공 성동익재공신 이분은 고려말 이조초의 혼탁한 정계에서 출장입상의 충성을 다한 분이다.

1337(충숙왕 복위 6)~1403(태종 3). 고려말 . 조선 초의 권신. 시호는 정평(靖平).

본관은 단양(丹陽). 59년(공민왕 8) 홍건적의 침입 때 원수 한 방신(韓方信)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이어 판선공시사(判繕工시事)를 거쳐 응양군 상호군(鷹揚郡上護軍)이 되었으며,

74년(우왕 즉위) 명사(明使) 피살사건으로 간관(揀官)의 탄핵을 받은 이 인임(李仁任)에게 아부하여 이를 변호했다.

이듬해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를 거쳐 77년 경상도 원수로서 사불랑(沙弗郞) .

영광(靈光) 등지에서 왜구(倭寇)를 격파, 다음해에 경상 . 양광 . 전라 . 삼도 도체찰사(慶尙楊廣全羅三道都體察使)가 되었다.

79년 원수로서 합포(合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이어 사주(泗州)에서 또 왜구를 대파하고 합포 도순문사(合浦都巡問使)가 되었다.

83년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청평(淸平)에 들어온 왜구를 토벌, 85년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88년(창왕 즉위) 찬성사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설 장수( 長壽)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창왕의 습위(襲位)를 알렸고 이듬해 김 저(金佇)의 옥사(獄事)에 변 안렬(邊安烈) . 이 임(李淋) . 우 현보(禹玄寶) .

이 색(李穡) . 왕 안덕(王安德) . 우 홍수(禹洪壽) 등과 함께 연루되어 유배 되었다가 91년(공양왕 3) 풀려나왔다.

92년 조선개국 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고 이듬해 귀국하여 판개성 부사(判開城俯使)가 되어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올랐다.

95년(태조4)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留後), 1400년(정종 2) 판승녕부사(判承寧俯事)에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01년(태종 1) 귀국,

이 해 정종의 사위(辭位)와 태종의 습위(襲位)를 허락한 데 대한 사은사로 또 명나라에 다녀왔다.

03년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올라 병사했다.

문숙공파의 파조

휘 (희열) 휘(복생)의 제 3자 (1354-1435)

충청,경기감사 호조판서 익호는문(강)공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관리. 본관은 단양(丹陽).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갔으나, 가계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1408년(태종 8)에 민무구(閔無咎)사건에 관련되어 하옥되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났으며, 이듬해 3월에는 제언(堤堰)수축을 통한 수리의 개발을 주장하여 태종대의 수리시설 확장사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413년에는 충청도도관찰사의 직임을 띠고 조운(漕運)의 편의를 위하여 시도된 태안반도 운하개통사업, 즉 축제(築堤)사업을 주관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경기·충청 양도의 권과농상사(勸課農桑使)로 나가 제언수축과 식상(植桑)의 일을 권장하였다.

1415년에 다시 충청도관찰사, 같은해 말에 경기도관찰사에 이어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가 되었다.

1418년 판청주목사로 있을 때 전국 각지에 제방과 관개시설의 목록을 갖추어 매년 수치하게 하고 경차관을 보내어 감독하게 하자는 건의를 올려 이를 실현시켰다.

김제 벽골제(碧骨堤), 부평 수용제(水桶堤) 등의 수축에 큰 공을 세웠으며 농업전문가로서의 활약이 컸다.

대제학공파의 파조 공양왕과 사돈

11세

휘(홍수)충정공의제1자(1355-1392)

집현전대제학,동지밀직사사,형조판서

1355(공민왕 4)∼1392(태조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단양백(丹陽伯) 현보(玄寶)의 아들이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낭장(郎將)으로 성균박사를 겸하였으며, 지신사(知申事)·대사헌을 거쳐, 창왕 때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김저(金佇)의 옥사에 관련되어 다음해에 인주(仁州:지금의 인천)에 유배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다시 기용되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나

1392년 정도전(鄭道傳)의 모함을 받아 정몽주(鄭夢周)일파로 몰려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가 장살당하였으나,

곧 신원(伸寃)되었다.

예안군파의 파조

이조개국시 정도전일파에 피화

휘 (홍부) 충정공제2자(-1411)

정헌부부,예조판서,예안부원군

묘 경기도 여주군대신면상구리

?∼1414(태종 14).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단양백(丹陽伯) 현보(玄寶)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입사, 1382년(우왕 8) 장복서령(掌服署令)으로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였다.

1392년(공양왕 4) 6월 전의감부령(典醫監副令)재직 중에 이성계(李成桂)일파의 구신(舊臣)제거와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원방에 유배하도록 결정, 이해 7월 고려 구신에 대한 재논죄와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결장(決杖)후 원방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면, 1398년(태조 7)윤5월 직첩(職牒)을 환급받았다.

1400년(정종 2) 1월 회안군(懷安君:芳幹)의 처질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가 아버지에게 회안군이 정안군(靖安君:뒤에 太宗)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이를 전해들은 그가 정안군에게 고변하였는데, 이해 11월 이 공로로 특별히 개성유후사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에 서용되었다.

1412년(태종 12) 방간의 난에 대한 공로가 다시 논의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예안군(禮安君)에 봉군되었다.

1413년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 벼슬아치에게 주던 사령장)을 몰수당하였으나 이듬해 질병을 기한 태종의 특은으로 고신을 환급받은 후 죽었다.

안정공파의 파조

휘 (홍강) 충정공제3자(1357-1423)

개성유후,대사헌,형조판서,대제학 익호 안정공 청백사

묘소 개성 장단면 장단군

1980년10.5 파주군파평면두포리 망제단건립

(공민왕 6)~1423(세종 5). 고려말 . 조선 초의 문관. 시호는 안정(安靖). 본관은 단양(丹陽). 현보(玄寶)의 아들. 78년(우왕 4)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된 뒤 삼사판관(三司判官) . 사예(司藝) . 전교부령(典校副令) . 강원도 안렴사(江原道按廉使) . 친어위대호군(親禦衛大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색 등과 함께 고려를 다시 세우려다가 삭직(削職)되어 원지(遠地)에 장류(杖流), 98년(태조 7) 풀려나와 직첩(職牒)을 환급(還給)받았다.

이어 좌사간(左司諫) . 판통례 문사(判通禮門事),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목사(牧使), 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

10년(태종 10) 이조참의(吏曹參議)로서 진한사(進獻使)가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다.

13년 한성 부윤(漢城府尹) .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뒤에 안동 부사(安東府使) . 홍주 목사(洪州牧使), 21년(세종 3) 개성 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에 이르렀다.

집의공파의 파조

휘(홍득) 총정공 제4자 (-1392)

집의, 전교영

이조개국시 정도전일파에게 피화

1980년 충북음성군 금왕면 사당건립

?~1392(태조 1). 고려의 문관. 본관은 단양(丹陽), 현보(玄寶)의 아들. 공민왕 때에 집의(執義), 뒤에 전교령(典校令)에 이르렀다.

92년 조선 개국 후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강원도에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장살(杖殺)당했다.

판서공파의 파조

휘(홍명) 충정공제5자(-1392)

예조정랑,예조판서

이조개국시 정도전일파에게 피화

1949년 달성군월배면 설단

?∼1392(태조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아버지는 단양백(丹陽伯) 현보(玄寶)이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장원급제, 공양왕 때 이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아버지 현보와 형제인 홍부(洪富)·홍득(洪得) 등과 함께 이초(彛初)의 난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 고려의 유신(遺臣)으로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 획책하다가 전라도에 귀양, 유배지에서 장살당하였다.

이상파조까지만 기술하고 파조이하는 족보를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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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9br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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