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정도전

선비와 대화가 통하는 무장을 선택해 혁명에 성공한 정도전은 야인생활의 한을 풀듯이 왕성하게 일을 추진했다.

오늘날에도 명문장으로 회자되는 혁명공약을 혁명 열흘 만에 발표했다.

조준과 함께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참여하는가 하면 신생국 조선의 기본 강령을 담고 있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집필에 착수했다.

납씨곡(納氏曲)과 정동방곡(靖東方曲) 등 음악을 쓰고 사시사철 사냥하는 그림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를 그려 사냥을 좋아하는 주군을 기쁘게 했다. 병법에 능통한 임금에게 오군진도(五軍陣圖)를 제시해 깜짝 놀라게 했다.

문무와 예(藝) 그리고, 군사를 넘나드는 만능에 팔방미인이었다. 한마디로 주군이 무엇을 좋아하고 역린(逆鱗)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성계 이후의 밑그림을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방석의 세자책봉이다.

혁명가는 수명이 짧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혁명가는 신념과 열정으로 혁명을 성공시키면 역사의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모의 단계에서는 "실패하면 이 한 몸 죽어 희생 된다"라고 생각하지만 성공 이후에는 후대의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두렵기만 하다.

때문에 많은 업적을 남기려 무리수를 두 개 되고 육체적으로도 혹사하게 된다. 더불어 환경의 변화는 주변에 주지육림(酒池肉林)이 대기상태다. 주색에 곯는다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생명단축의 원인이 되어 수명이 짧다는 것은 고금의 통설이다. 이것을 정도전이 모를 리 없다.

혁명가는 외롭다
혁명은 여러 사람이 하지만 진정한 혁명가는 단 한 사람이다. 혁명은 피라미드형이다. 정점에 두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한 사람이다. 실패하여 처형을 당할 때는 주범이라는 두름에 여러 사람이 엮이지만 그것은 처벌하기 위한 법률적인 수단일 뿐, 혁명가는 오로지 한 사람이다. 그래서 혁명의 과실은 여러 사람이 따먹지만 혁명가는 외롭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 손에 쥔 실력자가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쾌속 질주할 때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그릇의 차이와 중량감의 차이가 난다. 현자(賢者)는 힘이 자신에게 모아졌을 때 더욱 겸손하고 처결의 완급을 조절한다. 덕(德)은 가진 자만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정도전에게는 출생의 의혹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려 조정에서도 냉대를 당했다.

이색 문생으로서 정몽주, 이숭인, 길재 등과 당당히 겨루어 실력이 부족함이 없었으나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주류로부터 중심세력권의 진입을 거부당하는 비주류였다. 이것이 정도전의 울분이었고 비분의 원천이었다.

정도전의 출생의 비밀은?

"우현보의 족인(族人) 김진이란 사람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진이 후일에 속인(俗人)이 되어 종 수이를 내쫓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 딸을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어 딸 하나를 낳아 정운경에게 시집보냈다. 그 딸이 아들 셋을 낳았으니 맏아들이 정도전이다."(태조실록)

다시 설명하면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노비의 딸이라는 것이다. 바람둥이 땡초 중이 노비를 건드려 정도전의 외할머니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호적관계가 불분명하던 시대에 확인할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적서(嫡庶)를 분명하게 따지던 당시에 정도전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하는 악재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하여 죽고, 태종 조에 편찬된 태조실록이 진실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진실로 받아들인다.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록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역사의 일부분이고 자료일 뿐이다. 역사에는 사실이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진실이라는 속살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비록 문하시랑 찬성사라는 직책은 낮았지만 막강 권력을 손에 쥔 정도전이 칼을 뽑아들었다. 자신을 냉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성 칼이었다. 소문을 확대재생산한 우현보에게 원한이 컸다. 스승이지만 이색에게도 서운함이 컸다.

도당(都評議使司)의 이름으로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을 제주도와 추자도로 귀양 보내자고 임금에게 청했다. 명분은 혁명을 반대하는 반혁명세력 척결이었지만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성계는 반대했다.

“내가 이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했는데 지금 또 여러 섬으로 나누어 귀양 보낸다면 이는 신(信)을 잃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이 없는 땅에 귀양 보낸다면 의복과 음식을 어찌 얻겠는가? 반드시 모두 굶주림과 추위에 죽게 될 것이다.” (태조실록)

그렇다면 이색을 자연도(紫燕島)로 귀양 보내자고 정도전이 다시 주청했다. 경기 계정사(京畿計程使)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어렵게 여겨 그 구처(區處)할 것을 물으니 정도전이 대답하였다.

“섬에 귀양 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 넣자는 것이다.”

정도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색을 장흥(張興)으로 귀양 보내라는 명령이 나오게 되니 정도전의 계획이 관철되지 못했다.

마침내 여러 주(州)에 나누어 귀양 보내니 우현보는 해양(海陽)으로, 설장수는 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연변(沿邊)의 주군(州郡)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보복에 나선 정도전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중하위급 처결의 대상이어서 곤장 형으로 감형 받은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8명이나 되었다.

경상도에 귀양 간 이종학과 최을의, 전라도에 귀양 간 우홍수, 이숭인, 김진양, 우홍명 양광도(楊廣道)에 귀양 간 이확과 강원도에 귀양 간 우홍득 등 이었다.

당대의 유학자 이숭인과 선죽교에서 격살당한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준 우현보의 세 아들이 비명에 숨진 것이다. 우현보는 방원의 어렸을 적 스승이자 깐깐한 유학자였다. 음모에 의한 계획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장형을 집행당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정도전의 주청을 마지못하여 받아들인 것이 이와 같은 변을 불러 온 것이다. 정도전은 곤장을 치라는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남은과 황거정을 몰래 불렀다.

“곤장 1백 대를 맞은 사람은 마땅히 살지 못할 것이다.”

“황거정 등이 우홍수 형제 3인과 이숭인 등 5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여서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고는 황거정 등이 돌아와서 곤장을 맞아 병들어 죽었다고 아뢰었다.

정도전이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서 사감(私憾)을 갚았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뒤에 그들이 죽은 것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태조실록)

‘살지 못 할 것이다’는 “살아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곤장 100대 라는 숫자는 무의미 하다. 형벌의 의미로 죽지 않도록 치는 100대와 죽도록 치는 100대는 그 농도와 강도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곤장을 맞은 죄인이 형장에서 죽게 되면 형리가 처벌받는 것이 당시의 법도였다.

이색 문생으로 금릉에 있는 주원장에게 표문을 올려 황제의 마음을 흔들었던 당대의 문장가 이숭인은 이렇게 죽어라고 치는 매를 볼기가 아닌 등골에 맞고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훗날 부메랑이 되어 정도전의 발등을 찍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비화한다. 태종으로 등극한 이방원은 황거정과 손흥종 등이 임금을 속이고 제 마음대로 죽인 죄를 소급해 다스려서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었다.

“그때 정도전, 남은이 만일 곤장 1백 대를 때린 뒤에 죽지 않거든 교살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목 졸라 죽였습니다.” (태종실록)

정도전의 밀명을 받고 장형(杖刑)과 교살을 실행한 손흥종의 자복이다.

“개국의 공은 남은이 많았으니,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힘써 아뢴 일이 있었으나 정도전은 개국할 때에도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다.

그 뒤에 적서(嫡庶)를 분변할 때에도 한 마디 언급하지 않았다.

임금을 속여 이숭인 등을 함부로 죽여 그 몸의 허물을 없애려 하였으니 죄가 공보다 크다.

마땅히 전민을 적몰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라.”(태종실록)

Posted by 9br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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