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룡 묘(禹伏龍墓)

􄤰 소재지 : 미산면 백석리 산18임(지도158 참조)

􄤰 시 대 : 조선시대

􄤰 종 류 : 묘

우복룡(1547∼161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 은 단양이다. 자는 見吉이고 호는 懼庵·東溪이며 현 령 효친의 증손자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 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재 임 중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왜적과 수차례 싸워 고을 을 지킨 공이 인정되어 안동부사로 승진하였고 강화유 수, 홍주·나주·충주목사, 강원도·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만년에 성천부사를 제수 받았으나 나가 지 않고 왕징면 무등리에 무등장을 짓고 세속과 거리 를 두고서 깨끗한 몸가짐으로 독행하면서 일생을 마쳤 다.

저서로는『懼庵集』이 있다. 묘는 백석리 분석골의 나즈막한 구릉 중턱에 남향하 여 있다. 바로 위에는 父崇善과 母경주 이씨의 쌍분 이 상석·향로석·묘표·동자석 등의 석물을 갖춘 채 위치하고 있다. 정부인 진천 송씨와의 쌍분인 원형봉 분의 크기는 직경 290㎝·높이 85㎝이다.

봉분 앞에는 중앙에 비신 월두형의 묘표·상석·4 각 향로석과 좌측에 동자석 1기 및 우측(서쪽)에 묘비 등의 석물이 위치하고 있다. 묘표는 전·좌 2면에 비 문이 있으나 많이 마모된 상태이며, 비신 전면에 종2 열로"通政大夫守忠淸道觀察使… 貞夫人鎭川宋氏…" 의 비문이 있다. 건

립연대는 1628년(인조 6)이며, 비신 의 크기는 높이 117㎝·너비 45㎝·두께 18㎝로 표면 에 탈락이 있다. 상석은 높이 16㎝·너비 130㎝·두께 76㎝이다. 향로석은 높이 28㎝·너비 31㎝·두께 27 ㎝이다.

동자석은 좌편에 1기만 있는데 어깨 폭 37 ㎝·높이 97㎝이다. 묘비는 비신 월두형으로 봉분의 우측(서쪽)에 동향 하여 묘를 바라보고 있다.

비신의 비문은 4면에 있으 며 전·후 상단 2면에 걸쳐"江原道觀察使懼庵禹…" 의 비액이 있다. 비제는"有明朝鮮國....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界節度使巡察使懼庵禹先生墓碑銘幷序"이다.

백색 대리석의 비신은 전면 우측 중앙으로 15 ㎝ 가량의 결락이 있고, 후면은 전체 탄흔으로 인해 깊 이 파여 있다. 비문은 좌참찬 겸 대제학인 趙絅이 撰하 고, 孫弘成이 篆을, 孫鼎來가 書했다. 건립연대는 1694년(숙종 20) 8월이다.

규모는 비좌가 높이 30㎝·너비 104㎝·두께 68㎝ 이다. 비신이 높이 145㎝, 상단 너비 60㎝·하단 너비 56㎝, 두께 16㎝이다.

우복룡(禹伏龍) 1547(명종 2)~1613(광해군 5)

조선의 문신. 자는 현길(見吉), 호는 구암(懼庵)·동계(東溪), 현령(縣令) 효친(孝親)의 증손, 민순(閔純)의 문인.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儒生)으로, 성균관의 예식에 참석하는 3공(公)과 6조(曹)의 당상관(堂上官)에게 유생들이 정배(庭拜)하는 관례를 읍례(揖禮)로 사정토록 하여 사림(士林)의 권위를 높였다. 1577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소문전 참봉(昭文殿?奉)이 되고,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김포 현령(金浦縣令)을 역임, 1592년 임진왜란 때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용궁을 끝까지 방어, 그 공으로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올랐다. 1599년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고, 나주 목사(羅州牧使)·충주 목사(忠州牧使)를 거쳐 1612년(광해군 4) 성천 부사(成川牧使)에 이르렀다.

우복룡(禹伏龍)

1547(명종 2)~1613(광해군 5)

본관(本貫)은 단양(丹陽),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으로 미산면 백석리 분석골에 묘(墓)가 있다. 자(字)는 현길(見吉), 호(號)는 구암(懼庵) 또는 동계(東溪)이다. 현령(縣令) 효친(孝親)의 증손자이며, 민순(閔純)의 문인(門人)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되었고 그 뒤 우의정(右議政) 이탁(李鐸), 이조(吏曹)판서(判書) 이이(李珥)의 천거(薦擧)로 내섬시직장으로 승진(陞進)하여 종부시주부․공조좌랑․목천현감․김포현령․지평(持平)을 거쳐 1589년 용궁현감이 되었으나 재임(在任)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여 왜적(倭敵)과 수 차례 싸워 고을을 지킨 공이 인정(認定)되어 안동부사로 승진(陞進)하였다. 강화유수, 홍주․나주․충주(忠州) 목사(牧使)와 강원도(江原道)․충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歷任)하였다. 만년(晩年)에 성천부사에 임명(任命)되었으나 사양하고 왕징면 무등리에 무등장(無等庄)을 짓고 세속과 거리를 두고서 깨끗한 몸가짐으로 독행(獨行)하면서 일생(一生)을 마쳤다. 저서(著書)로는 『구암집(懼庵集)』이 있다.

- 참고문헌 『宣祖實錄』;『光海君日記』;『國朝人物考』;『眉?記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연천군(인물)

충주시(역사 인물)

우복룡(禹伏龍)

(1547(명종 2) ∼ 1613(광해군 5))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현령 우효친의 증손이며 1547년(명종 2)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현길이며 호는 구암 또는 동계이고 본관은 단양이다. 학덕이 매우 높은 민순에게서 수학했다. 그는 고봉산하에서 가르쳤는데 홍가신·홍이상 등은 모두 그와함께 강마한 도제였다.

1567년(명종 22) 국상에 유사유생의 복제를 의론할 때 다만 백의관으로 하자 하니 우복룡이 우리같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유라 할지라도 덕화를 입었는데 어찌 복이 없을 수가 있는냐고 항언하여 상복을 만들어 3년을 입게하였다. 1573(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과 유생으로 있었다. 성균관의 예에 대과시에는 삼공육조의 당상관은 명륜당에 앉고 유생들은 뜰 아래서 배례를 하도록 되었다.

이때 우복룡은 홀로 읍을 하면서 군부의 앞이 아니고는 정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좌상 노수신이 우복룡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여러 재상들과 상의하여 배를 혁하고 읍례로 정하였다. 정배의 예는 소유들의 평생 싫어하든 바였으니 이로부터 유생들의 권위가 서게 되었다.

1577년에 학행의 선비 6명을 뽑는데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 뽑히게 된바는「천자초매 학행포저」이었으니 남보다 뛰어난 천품과 두드러진 학행이 있다는 것이다. 소문전참봉이 되고 내섬시직장·김포현령을 역임하고 1589년(선조 22)에 용궁현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앞장서서 용궁을 끝까지 방어하는데 성공하였으니 다른 열군이 모두 무너졌으나 홀로 용궁현만은 온전 하였다.

따라서 이듬해인 1593년에 안동부사가 되었다. 2년만에 사퇴하고 1596년에 강원도관찰사에 명을 받았으나 해구가 급하여 강도유수가 되어 옮겨가서 지켰다. 매우 엄하고 공정하게 다스렸으니 귀척이라 하더라도 비행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비방으로 말미암아 체직되었다.

1599년에 홍주목사, 충청감사, 나주목사, 충주목사를 거쳐 1612년(광해군 4)에 성천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67세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구암집」·「동계잡록」이 있다.

역대주요인물(歷代主要人物) 조선조(朝鮮朝)

우복룡(禹伏龍) 호당(湖當)

우복용(禹伏龍) (宣祖朝) 청백리(淸白吏)

우복용(禹伏龍) 문집(文集) 구암집(懼庵集), 동계잡록(東溪雜錄)

丹陽禹氏 千年의 빛과 그림자

제29세손(第29世孫) 지암(芝巖) 우재충(禹在忠) 서(書)

우복용(禹伏龍)

우복용(禹伏龍)할아버지(1547[명종 2]-1613[광해군 5])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선조 때의 유학자이자 부사, 목사 등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希烈할아버지의 5대 손이고 현령(縣令)인 孝親할아버지의 증손자이다. 1573[선조 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때까지 유생들이 성균관의 의식에 참석한 삼공(三公: 3정승)과 육조(六曹: 吏 戶 禮 兵 刑 工을 말함)의 당상관(堂上官)들에게 정배(庭拜)를 해오던 관례를 깨고 읍례(揖禮)로 시정하도록 함으로써 유생의 권위를 높였다.

1577년 학문과 행실이 모범이라는 이이(李珥)의 천거로 소문전참봉(昭文殿參奉: 참봉=각 관청에 소속된 종9품 벼슬)이 되었고 이어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각 궁가(宮家)의 공상(供上=진상)과 2품관 이상에 하사하던 주효(酒肴) 또는 일본인이나 여진인에게 주던 식물, 직포(織布) 등을 담당하는 관청의 종7품 관리)과 김포현령(金浦縣令)을 역임하였다.

이어 목천현감(木川縣監)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때에는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서 끝까지 고을을 지킨 공이 인정되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승진하였다.

그 뒤 강도유수(江都留守)로 있을 때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권세가(權勢家)의 횡포를 금단(禁斷: 금함)하니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아 1599년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선정(善政)을 베풀어 임금의 아낌을 받았고 나주, 충주목사(忠州牧使)를 거쳐 1612[광해군 4]년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이르렀다. 문집으로 <구암집 懼菴集>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상게서 454/5쪽, 韓國姓譜編纂委員會 전게서 12쪽.

정수루(正綏樓,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86호)
수루는 나주목 관아의 정문이다. 정수루는 조선 선조 36년(1603년) 나주목사 우복룡(禹伏龍)이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목사 민백남(閔百男)이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름도 영수루(永綏樓)로 적혀 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9세기에 크게 중수한 건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원래는 누각의 아래로 사람들이 통행하였고, 비가 오지 않아 논밭이 갈라질 때는 다보사의 대형 괘불탱화를 걸어 놓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명절때는 이곳에서 노래자랑대회도 열렸다.

정수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층의 양 측면만 벽체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개방되어 있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낮은 원형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2층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다.

원래 현재 매일시장 자리가 예전에 5일장이었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수루 옆에 나무전이 섰다고 한다. 나무꾼들은 문평이나 경현리에서 나무를 두 짐씩 교대해서 지고 와서 이곳에서 팔았다.
최근에는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두르고 도로를 옆으로 내었다.

Posted by 9br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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