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석(禹天錫)

  • 인물구분 : 무신
  • 시 대 : 고려시대
  • 출 생 지 : 알 수 없음
  • 생몰연도 : 알 수 없음
  • 관련유적 :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우천석 묘)

가. 생애 및 활동

우천석은 고려의 무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태어난 시기와 사망한 시기를 알 수 없다. 1268년(원종 9) 몽고와의 강화가 이루어 진 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서 낭장 박신보(朴臣甫)와 함께 몽고의 사신 왕국창(王國昌)일행을 흑산도로 인도하여 뱃길을 살폈다. 이는 남송(南宋)과 일본의 도발을 미리 막고 견제하기 위한 몽고의 조처였다. 1273년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제주를 거점으로 하여 저항하는 삼별초를 공격에 참가하였다가 전함을 파선하였다는 이유로 다루가치(達魯花赤) 이익(李益)의 문책을 받아 투옥되기도 하였다. 1277년(충렬왕 3) 전라도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를 거쳐, 1280년 잡단(雜端 : 어사대의 종 5품 관직),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나. 현장 체험 학습

(1) 우천석 묘소


(가) 개요

우천석의 묘는 송강리 행정마을에 있다. 묘의 면적은 약 50여평 정도이고 묘는 네모형태의 방형분이다. 돌을 다듬어 4-5단을 쌓아 네모난 형태의 호석을 두르고 있는데 호석은 높이가 앞면이 90cm이며 뒤로 가면서 산의 경사면 때문에 낮아져 50cm정도이고 뒤로는 흙으로 연결되고 있다. 석물은 상석 일체와 상석의 좌측에 옛날 묘표(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諱天錫之墓)가 있고 우측에는 1980년에 세운 새로운 묘비(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之墓)가 있으며 묘비 앞에 문인석이 있다.

(나) 찾아가는 길


충주시내에서 목행대교를 지나 직진하다 보면 영덕삼거리가 나오고 제천방향으로 조금 가면 산척면 소재지가 나온다. 산척농협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가다보면 길 왼쪽으로 손순효 신도비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바로 세 갈래 길이 나온다. 가운데 길로 500m 쯤 가면 왼쪽 산 중턱에 우천석 묘가 잘 보인다.

(2) 우평 묘

우천석 묘 바로 뒤에는 우천석의 아들 우평의 묘가 있는데 조성 양식이 우천석의 묘와 동일하며 〈고려밀직부사추봉시중사우공평지묘〉란 옛 묘비와 1980년에 세운〈문하시중평장사단양우공지묘 배군부인 청풍김씨합 부〉라 새겨진 묘비가 있다. 묘소 입구에는 천등재(天登齋)란 사당과 숭덕문(崇德門)이라는 출입문이 있고 사당 바로 좌측에 1982년에 세운 단양우씨제단비가 있다.

우천석(禹天錫)

고려의 문신. 1268년(원종 9) 도병마 녹사(都兵馬錄事)로서 몽고의 사신 왕국창(王國昌) 등을 인도하여 흑산도(黑山島)에 가서 남송(南宋)이나 일본(日本)이 모반할 때를 대비하여 그 뱃길을 미리 시찰, 1273년 서해도 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서 파선(破船)된 전함에 대한 책임으로 투옥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고, 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우천석 단양인

우천석은 고려(高麗)의 무신(武臣)으로 본관(本貫)은 단양(丹陽)이며 태어난 시기와 사망(死亡)한 시기를 알 수 없다. 1268년(원종 9) 몽고와의 강화가 이루어 진 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서 낭장 박신보(朴臣甫)와 함께 몽고의 사신(使臣) 왕국창(王國昌)일행을 흑산도로 인도하여 뱃길을 살폈다. 이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의 도발을 미리 막고 견제하기 위한 몽고의 조처였다.

1273년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제주(濟州)를 거점으로 하여 저항하는 삼별초를 공격(攻擊)에 참가(參加)하였다가 전함을 파선하였다는 이유(理由)로 다루가치(達魯花赤) 이익(李益)의 문책을 받아 투옥(投獄)되기도 하였다.

1277년(충렬왕 3) 전라도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를 거쳐, 1280년 잡단(雜端 : 어사대의 종 5품 관직)에 올랐다 우천석의 묘(墓)는 송강리 행정마을에 있는데 묘의 면적은 약 50여평 정도이고 묘는 방형분이다. 돌을 다듬어 4-5단을 쌓아 호석을 두르고 있는데 호석은 높이가 앞면이 90cm이며 뒤로 가면서 산의 경사면 때문에 낮아져 50cm정도이고 뒤로는 흙으로 연결되고 있다. 네모난 호석의 앞면은 263cm, 옆면은 550cm 정도이며 호석 위로 흙을 쌓고 잔디를 둘렀다.

석물은 상석 일체와 상석(床石)의 좌측에 옛날 묘표(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諱天錫之墓)가 있고 우측에는 1980년에 세운 새로운 묘비(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之墓)가 있으며 묘비 앞에 문인석(文人石)이 있다.

묘 바로 뒤에는 우천석의 아들 우평의 묘가 있는데 조성 양식이 우천석의 묘와 동일하며 〈고려밀직부사추봉시중사우공평지묘〉란 옛 묘비(墓碑)와 1980년에 세운〈문하시중평장사단양우공지묘 배군부인 청풍김씨합 부〉라 새겨진 묘비가 있다. 묘소 입구(入口)에는 천등재(天登齋)란 사당(祠堂)과 숭덕문(崇德門)이라는 출입문이 있고 사당(祠堂) 바로 좌측에 1982년에 단양우씨제단비가 있다.

역대주요인물(歷代主要人物)

우천석(禹天錫) 고려조(高麗朝) 문과(文科) 원종조(元宗朝)

丹陽禹氏 千年의 빛과 그림자

제29세손 지암 우재충(第29世孫 芝巖 禹在忠)

우천석(禹天錫)

우중대(禹仲大)할아버지의 맏아들인

우천규(禹天珪)할아버지(1253[고종 40]년)는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문하시중의 다음 벼슬)를,

둘째 아들 우천계(禹天啓)할아버지는 판서(判書: 고려 때 각 관청 및 6조(六曹)의 으뜸벼슬로 정2품 관직), 셋째

우천석(禹天錫)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 등

우천우(禹天佑)(군기윤 軍器尹),

우천성(禹天成)(낭장 郎將)할아버지을 포함한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모두 지금의 장관급이상으로 입신 출세하여 가문을 빛냈다.

이들 5형제 중 맏이인 우천규(禹天珪)할아버지의 아들이 바로 탁(倬)할아버지이다.

고려조(高麗朝)는 이 무렵 안으로는 왕권(王權)의 쇠미(衰微)로 정치적 변란( 變亂)이 여러번 일어나고 밖으로는 몽고의 외환(外患)으로 환난(患難)이 극에 달해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고려조는 부득이 1259[고종 46]년 몽고와 강화(講和)를 맺게 된다.

고려의 무신인 우천석(禹天錫)할아버지(생몰년 미상)는 단양 우씨로서 고려사에 등장한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무신으로서 몽고와의 강화가 이루어진 후 1268[원종 9]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병마사= 고려 때 동북 양계(兩界)의 군권을 지휘하는 정3품 벼슬)로서 낭장(郎將: 정6품의 무관직) 박신보(朴臣甫)와 함께 몽고의 사신 왕국창(王國昌) 일행을 인도하여 흑산도에 가서 남송(南宋)이나 일본이 도발할 때를 대비하여 그 뱃길을 미리 살피기도 했다. 이는 남송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몽고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또한 1273년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 안찰사=고려의 지방장관으로 절도사(節度使) 또는 안렴사(按廉使)라고 도 한다)로서 제주를 거점으로 하여 저항하는 삼별초(三別抄) 공격에 참가하였다. 삼별초는 몽고(蒙古)와의 강화(講和)와 삼별초의 해산을 반대해서 주로 강화도에서 조정에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고려 때의 군대였다.

그러나 天錫할아버지는 이때 전함을 파선(破船)하였다는 이유로

다루가치(達魯花赤: 음은 다로 화치. 총독이나 지사를 말함) 이익(李益)의 문책을 받아 투옥되었다.

그후 1277[충렬왕 3]년에는 전라도 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 안렴부사=지금의 부지사)가 되고 1280년 낭장(郎將)에서 잡단(雜端: 고려 때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을 규찰, 탄핵하는 일을 맡은 어사대(御史臺)의 종5품 관직)이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게서

충주“우천석·우팽 부자 묘소”도 지정문화재 지정예고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산105-1번지 내에 소재한 “우천석·우팽 부자 묘소(禹千錫·禹伻 父子 墓所) 2기가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결과, 문화재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도 지정문화재로 지정예고 됐다.


기념물로 지정 예고된 우천석·우팽 부자 묘소는 단양우씨 종회 소유로 별도의 가공을 하지 않은 자연 할석으로 4~5단씩 쌓아올려 경사면을 따라 묘가 조성되었으며 호석의 측면은 앞이 높고 뒷면이 낮은 방형분(方形墳)이면서 자연 할석으로 호석을 두른 묘제는 지역내에서는 보기 드물다.

규모는 우천석 묘소는 높이 1.5m, 둘레 14.5m이고, 우팽 묘소는 높이 1.5m, 둘레는 15m로 방형분 묘소이며 조선시대 조성되었다.

우천석은 고려의 무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태어난 시기와 사망한 시기를 알 수 없다. 1268년(원종 9) 몽고와의 강화가 이루어 진 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서 낭장 박신보(朴臣甫)와 함께 몽고의 사신 왕국창(王國昌)일행을 흑산도로 인도하여 뱃길을 살폈다. 이는 남송(南宋)과 일본의 도발을 미리 막고 견제하기 위한 몽고의 조처였다. 1273년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제주를 거점으로 하여 저항하는 삼별초를 공격에 참가하였다가 전함을 파선하였다는 이유로 다루가치(達魯花赤) 이익(李益)의 문책을 받아 투옥되기도 하였다. 1277년(충렬왕 3) 전라도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를 거쳐, 1280년 잡단(雜端 : 어사대의 종 5품 관직)에 올랐다 우천석의 묘는 송강리 행정마을에 있는데 묘의 면적은 약 50여평 정도이고 묘는 방형분이다. 돌을 다듬어 4-5단을 쌓아 호석을 두르고 있는데 호석은 높이가 앞면이 90cm이며 뒤로 가면서 산의 경사면 때문에 낮아져 50cm정도이고 뒤로는 흙으로 연결되고 있다. 네모난 호석의 앞면은 263cm, 옆면은 550cm 정도이며 호석 위로 흙을 쌓고 잔디를 둘렀다. 석물은 상석 일체와 상석의 좌측에 옛날 묘표(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諱天錫之墓)가 있고 우측에는 1980년에 세운 새로운 묘비(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之墓)가 있으며 묘비 앞에 문인석이 있다. 묘 바로 뒤에는 우천석의 아들 우평의 묘가 있는데 조성 양식이 우천석의 묘와 동일하며 〈고려밀직부사추봉시중사우공평지묘〉란 옛 묘비와 1980년에 세운〈문하시중평장사단양우공지묘 배군부인 청풍김씨합 부〉라 새겨진 묘비가 있다. 묘소 입구에는 천등재(天登齋)란 사당과 숭덕문(崇德門)이라는 출입문이 있고 사당 바로 좌측에 1982년에 단양우씨제단비가 있다.

Posted by 9brother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