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
우장춘 박사
소년기
세계적인 육종학자이자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장춘은 1898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우범선과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난 우장춘은 4세 때 본국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아버지를 여의고, 극빈한 가정형편으로 6세 때 도쿄의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장춘은 고아원 생활을 하면서 고아원 원생들에 의해서 조차 조선인이라고 갖은 멸시와 놀림을 당하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우장춘은 마음속으로 "자식들, 두고봐라. 언젠가는 내가 너희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말테야." 라면서 고아원 생활을 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런 다짐을 했었다.
어머니는 경제사정이 조금 나아지자 고아원에 있는 우장춘을 데리고 와서 히로시마의 구레(吳)로 이사를 가게 되고 중학교까지 그 곳에서 마치게 된다.
학창시절에도 우장춘은 일본인들의 갖은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우장춘은 어머니가 해 주신 말씀을 되새겼다.
우장춘의 어머니는 우장춘이 학교 친구들이 놀림과 멸시를 당하고 울며 들어올 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고 한다.
'장춘아. 저 민들레를 좀 보렴. 민들레는 숱한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면서도 꿋꿋이 자라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운단다.' 를 마음속에 떠올리며 일본인들의 멸시를 이겨냈었다.
우장춘은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에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해 공부하기 조차 어려웠지만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남편의 묘지까지 팔아서 우장춘을 가르쳤다.
그의 어렸을 때 꿈은 공과대학에 들어가 신기술개발에 일조를 하는 것이었지만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장학금이 아니면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마침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장학금이 있어 그것으로 대학에 갈 수는 있었지만 그가 원하던 공과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이유는 일본정부가 공학부에 진학할 경우 학비를 주지 않겠다고 하여 그는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해서도 성실한 자세로 공부해 항상 1등을 유지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의 뛰어난 정신력과 노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지만 뒤에서 뒷받침해 주는 어머니의 역할이 아주 큰 것이었다.
청년기
우장춘이 입학한 농학부 농업실과는 실습을 주로하며 농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학술적인 이론과 응용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반 대학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학교 시험장에서 날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 고된 일들을 해냈어야 했었다.
때문에 그러한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장춘은 그런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그런한 성실한 자세가 우장춘의 주임교수 다케시마를 감동시켰다.
다케시마는 우장춘을 농사 시험장의 소장인 안도 코타로 박사에게 적극 추천을 해서 그곳에 취직시키려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시험장의 소장인 고타로도 우장춘의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농림성의 농사 시험장에 채용시키게 된다.
농림성의 농사 시험장은 직원을 채용할 때에는 각 대학에서 1등한 한 사람만을 뽑았다.
따라서 이 농사 시험장에는 수재들만 모이게 되는 곳이다.
그가 첫 출근을 하는 날 우장춘의 어머니는 우장춘의 옷 매무새를 고쳐주면서 이런 말을 한다.
"비록 일본 사람들 밑에서 일하더라도, 너는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잊어서는 안된다.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해야 한다" 그는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당당하고 공명정대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폐쇄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회사 사람들을 집으로 매일이다시피 초대를 했었다.
또한 우장춘이 술을 못마시자 술을 마시지 못하면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며 날마다 술 한잔씩 마시는 연습을 시켰으나 결국 두 손 두발 다 들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장춘의 주량은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우장춘의 어머니는 우장춘이 일본사회에서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했다.
우장춘은 나팔꽃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밤낮으로 나팔꽃을 심고 그 씨를 받아 뒤적거리며 들여다 보거나 연구를 계속했다.
고생고생 해서 연구한 끝에 우장춘은 <유전학>이라는 잡지에 "나팔꽃 품종과 특성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나이 스물 세 살 때 쓴 최초의 논문이었다.
이 무렵 우장춘에게는 고하루라는 여자가 그의 삶에 찾아오게 된다.
고하루는 조선인하고는 절대 안된다는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나중에는 집안과 인연을 끊고 우장춘을 따라 우장춘과 결혼을 하게 된다.
또한 우장춘은 농림성의 고노스 시험장이 완성되어 그곳으로 전근을 가게 된다.
우장춘의 부인이 된 고하루 여사는 우장춘의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고 집안일에 시간을 뺏기게 될까 집안에 신경쓰지 않게 집안 운영도 열심히 하게된다.
전근을 간 그곳에서 우장춘은 100% 겹꽃 피튜니아를 개발하고, 유채 씨앗의 품종 개량을 통하여 새로운 종을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전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우장춘이 데라오 박사 밑에서 일할 때 유채씨앗을 담당하고 있던 우장춘은 피튜니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우장춘은 데라오 박사와 공동으로 피튜니아에 대한 연구 논문을 두편 발표하게 된다.
첫번째 논문은 <백록 녹심형 반엽의 아조 변이 및 모친 유전>이고, 두 번째 논문은 <자가 붙임성 유전현상>이었다.
우장춘 박사가 피튜니아를 개발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종묘상에서 사카다라는 사람이 다른 종자와 함께 피튜니아 홑꽃 종자의 견본을 들여와 한번 연구나 해보라고 데라오 박사에게 전해주었는데 데라오 박사는 이 피튜니아를 대량으로 재배해 보라고 우장춘에게 전해주었다.
그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입하던 우장춘은 완벽한 겹꽃 피튜니아를 개발하게 되어 육종학의 마술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우장춘은 유채씨앗 연구실에서 품종개량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맡은 연구는 십자화과 식물의 종간 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여간해서는 되지 않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식물의 종간교배에서 조선종과 일본종은 서로 종이 달라 보통의 방법으로는 서로 교배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염색체를 분석한 결과 어떠한 방법으로도 반드시 교배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고 수천번의 엄청난 실험 중에서 딱 한가지 방법으로 성공하게 된다.
그것은 대단한 의미의 성공이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는 없었던 새로운 종을 우장춘이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인 육종학 논문이 된 <종의 합성>의 효시다.
우장춘은 이 연구를 4년동안 거듭해 마침내 성공하고 이 논문으로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또한 이 논문은 세계적인 유전학자 다윈의 '진화론'의 일부를 수정 보완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장년기
그러나 1937년 우장춘 박사는 이름이 일본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농림성의 농사 시험장에서 강제 추방을 당해야만 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그곳이 한국이라면 또 그 당시 시대상황이 일제치하가 아니었다면 우장춘은 결코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장춘 박사는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재직중인 18년 간을 육종학 연구에 몰두하여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우장춘 박사는 18년간 정들었던 농림성 농사시험장을 그만 두고 주위의 도움으로 다키이 농묘회사 농장장으로 옮겨 연구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장춘은 학자로서의 연구보다는 농업기술자로서 우량 종자의 생산 방식과 체계를 확립하는데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일본의 과학적 육종 기술을 끌어 올리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우장춘 박사는 <채소의 육종기술>이라는 강연회 글을 통해 과학적인 육종기술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우박사는 다키이 종묘 회사에 근무하며 농장의 기반을 다지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 기간에 교토대학의 강의도 하면서 농업에 대한 연구를 열심히 했었다.
그런던 중 드디어 우리나라 민족이 그렇게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이 이뤄졌다.
조국이 해방되자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서 좌우되던 농업이 일제의 본국귀환이 이뤄졌고 더불어 일본 학자들이 귀국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농업에 일대 혼란이 야기된다.
이러한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농업에 관한 뛰어난 학자가 필요했고, 우장춘 박사가 적임자라고 생각해 우장춘 박사의 귀국을 돕기 위한 조직체<우장춘 박사 환국 촉진위원회>까지 결성된다.
1950년 3월 우장춘박사는 귀국하여 그는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게 되고 국내에서 연구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각종 식물의 종자 개량과 보급에 전념했다. 그 동안 탁월한 육종지식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연구를 거듭한 결과 우량종자의 생산체계를 확립해,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종자를 국내에서도 자급할 수 있었다.
우장춘 박사의 귀국 당시의 우리나라 농업기술개발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식량자급 달성을 위한 증산기술이었고 이에 못지 않게 무, 배추 등 연간 수백만석이란 막대한 수량의 채소종자의 자급자족이었다.
1954년에 결구배추인 원예 1호가 육종 발표되었고 그 이후 수많은 원예작물의 품종개량과 신품종의 육종으로 오늘의 눈부신 기술개발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묘사들에 의한 민간 육종을 태동케 하였고 또한 많은 육종기술인재들이 우장춘 박사의 슬하에서 육성되었다.
우장춘 박사는 천성이 소박하고 담백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매사가 공명정대할 수밖에 없었다.
나쁜 것을 좋다고 말해 본 적이 없는 그의 성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수사기관으로부터 이데올로기상 문제가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일본에 있는 그의 장녀 결혼식은 물론 어머니의 장례식조차도 가볼 수 없게 출국정지 처분을 받게 한다.
우장춘 박사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도 못보고 한국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나의 조국이란 말인가!"
출국정지를 받은 우장춘 박사는 한국에서 시체 없는 어머니 장례식을 통곡하며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아끼는 친구, 학계 및 유지들의 진정한 애도 속에 그런 장례식을 치른 다음 상당 금액의 부의금이 들어왔는데, 그 돈으로 그는 동래 원예 시험장에 우물을 파고 자유천(慈乳泉) 이라 명명하였다.
민족을 위해 자신을 바쳐온 노력으로 우리 나라 근대농업을 개척한 우장춘 박사,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건국이래 두 번째로 대한민국〈문화포장〉을 수상하였다.
농업 근대화에 일생을 바친 그는 1959년 8월 10일 향년 61세로 생애를 마친다. 우장춘 박사는 임종 전에 그가 연구 중인 벼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먼저 죽어야 하다니."
그는 이렇게 말을 하고선 한 손에는 그 벼를, 다른 한 손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수여한 문화포장을 꼭 쥐고서 눈을 감았다 한다.
그의 시신은 한국 농업의 총본산인 수원 농촌 진흥청 구내의 여기산 기슭에 묻혀있다.
" 불우와 고민 속에 진리를 뽑아내어 종자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자던 학문의 바다 물결 한번 치리라. 온갖 채소종자 우리 힘으로 길러내어 겨레를 위하시니 그 공도 얼마든지 빛나는 문화표창을 웃고 받고 가니라
흙에서 살던 인생, 흑으로 돌아가니 그 정신 뿌리되어 싹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 만발 하리라. "
1950년대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황폐화한 한국농업의 부흥을 위해 혼신을 다 바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육종학자이신 우장춘(禹長春)박사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문에 쓰여 있는 글이다.
개인 프로필
한국의 농학자 (1898 ~ 1959)
출생지 : 일본 도쿄
활동분야 : 농학
주요수상 : 문화상 과학부문상(1957),
대한민국 문화포장(1959)
주요저서 : <십자화과의 게놈 분석과 유채의합성>
주요논문 : 종의 합성(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게 되는 중요한 논문)
우장춘 박사의 논 문 >>
종자로서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
페튜니아에 있어서의 백연녹심연반엽의 아조변이 및 모친유전
페튜니아에 있어서의 자가불임성의 유전현상
나팔꽃에 있어서의 돌연변이의 발현에 관한 연구
나팔꽃 송엽형의 상변성 돌연변이에 대하여
나팔꽃에 있어서의 Haploid 식물의 발생
페튜니아에 있어서의 증변화의 유전
유채품종의 특성조사
유채의 캄페스트리스품종과 나프스품종과의 결실성 및 자연교잡에 관한 차이에 대하여
On the reppearance haploid in the japanese Morning Glorr
B.rassica campestris L.과 B.oleraoea L.과의 잡종에 있어서의 세포유정학적 연구
Genome-analysis in B.rassic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experimental fomation of B.napus and peculiar mode of fertilization
유채묘의 절간신장과 그 해부적 특징
A report on Meiosis in the two Hybrids,
B.rassica alba Rabh. ♀ × B.oleracea L. ♂
and Eruca sativa Lam. ♀ × B.oleracea L. ♂ on Diploid and Triploid B.rassica-Raphanus Hybrids
페튜니아의 총증 변화종자에 관하여
페튜니아 소수화의 유전
소채의 육종기술
primura malacoidis Franch.의 2培體 × 4培體 F₁에 있어서의 핵학적 관찰
연보
1898. 4. 08 아버지 우범선(禹範善)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사이에서 태어남
1916. 3. 19 일본 히로시마현립(廣島顯立) 구레(吳)중학교 졸업
1916. 4. 01 일본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농학부실과(農學部實科) 입학
1919. 8. 09 일본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졸업
1920. 6. 07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기수(技手)
1936. 5. 04 일본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農學博士)학위를 취득함
1937. 8. 25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기사(技師)
1937. 8. 26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사임
1937. 9. 11 일본 교토 다키이 연구농장장(硏究農場長)
1945. 9. 02 다키이 연구농장 사임
1945. 10. 01 일본 교토쵸우호우지(長法寺)에서 칩거(蟄居)
환 국 후
1950. 3. 08 귀국(歸國)
1950. 5. 10 한국 농업과학연구소 소장
1953. 8. 01 중앙원예기술원 원장
1954. 4. 20 학술원 추천 회원 피선
1957. 12. 23 제1회 부산시 문화상(과학상)을 받음
1958. 1. 23 원예시험장장
1959. 8. 09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음
1959. 8. 10 서거(逝去)
우장춘은 우리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침탈의 소용돌이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을 무렵의 1898년에 태어났다.
그 무렵은 제국주의 열강이 우리나라의 주요이권 침탈에 본격적으로 손을 뻗치기 시작한 청일전쟁 뒤의 암울한 시대였다.
그 당시 이권침탈에 앞장선 나라는 러시아와 미국이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한 러시아는 각종 이권을 따내며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해갔다,
미국도 겉으로는 '불간섭 정책'을 취했지만 황실의 환심과 신임을 받고 있던 선교사, 외교관등의 역할에 힘입어 광산채굴권을 비롯한 전자, 철도 등의 많은 이권을 독차지했다.
미국이 차지한 평북 운산금광은 조선 전체 금 생산량 가운데 약 1/4을 생산하는 '노다지 금광'이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이 러시아, 미국, 일본 및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등쌀에 힘겨워하던 시기에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 일본동경에서 한말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 우범선(禹範善)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난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별기군 훈련 제2대대장으로 친일파 정객이었으나 그 다음해 친일파를 반대하는 친 러시아파가 아관파천을 일으켜 정권이 뒤바뀌자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인 여자와 결혼해서 우장춘을 낳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1984년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만큼 국민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으며 외국의 수탈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했다.
농민 전쟁 뒤에 우리나라가 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제국주의에 기생하는 세력들은 성장하엿고 이들의 수탈대상이었던 민중은 빠르게 몰락해갔다.
대한제국 때 지주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으나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소농·빈농층은 끊임없는 몰락을 강요당했다.
지주들이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그 수익으로 다시 토지를 사들이자, 많은 농민들은 토지에서 내몰렸다.
토지에서 내몰린 몰락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광산, 부두 등지로 흘러들어가 노동자층을 형성한다.
그들은 죽도록 일했지만 하루 살기도 어려울 만큼의 임금밖에는 받지 못했다.
또한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친일 갑오정권은 봉건유생이 권력에 나가는 유일한 길이던 과거제도를 없애고 신식학교를 세우는 등의 일련의 부르주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양반 유생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마침내 폭발해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수비대와 거류민 그리고 단발 개화정치를 강제하던 '왜군수'·'왜관찰사'를 공격하였다.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지만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양반유생이 중심이 된 을미의병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듯 우리나라 민중들은 제국열강에 기대지 아니하면 온갖 수탈과 억압을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할 시기에 우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었다.
바로 나라를 잃은 설움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대한제국시기에는 농민항쟁이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지주에게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항조운동과 정부 또는 지방관의 부당한 조세수취에 저항하는 항세 운동에서 비롯된 자연 발생적인 농민봉기가 잇달았다.
계속되는 일제시대에서도 농민들은 지방관과 일제의 핍박과 수탈을 받으면서 근근이 삶을 연명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수탈은 우리나라의 계급과 민족 모순을 더욱 심화시켜 일제침략에 맞선 온 민족의 저항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 무단통치를 실시했는데 이것이 우리 민족의 단결을 부추키고 비밀결사대등이 생겨 마침내 1919년 3. 1 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를 내리고 일명 문화통치라는 방식으로 우리 민족을 수탈해 나가기 시작한다.
일제는 1차 세계대전으로 엄청난 전시 초과이윤을 얻었지만, 1920년 공황으로 입은 경제손실을 식민지로 떠 넘기려 했다.
곧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우리나라의 쌀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산미증식계획은 일본이 모자라는 식량을 우리나라에서 빼내어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산미증식계획이 중심이 된 일제의 농업정책은 조선농민을 일본자본아래 놓이게 했다.
이로 인해 식민지지주제가 강화되고 또한 수리사업이 진전되면서 쌀 생산은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수리조합에 설치된 지역의 소토지 소유자들은 늘어나는 수리조합비와 온갖 잡세를 견디지 못해 몰락할 지경이었다.
또, 거듭되는 농업공황의 물결은 농산물과 공산물의 가격차를 더욱 벌려 농민을 끊임없이 토지에서 내몰았다.
이렇게 농민들은 수탈을 당해 농민들끼리 단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22년 4월 '소작인은 단결하라'라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선언에 영향을 받아 전국 농촌에는 각종 농민단체들이 생겨났다.
농민들은 군을 단위로 연대투쟁을 위한 연합회를 결성하는 하기도 했으며, 지주와 지주를 감싸고 도는 일제를 규탄하는 토론회·집회등을 열어 농민의 계급의식을 높혀 나갔다.
계속되는 일제의 수탈은 막바지도 치달을수록 그들의 악행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일제는 경제공황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길로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를 병참기지로 만들어갔다.
그때까지 실시했던 문화정치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이제는 본격적인 얼굴을 드러내 민족말살정책까지 펴기 시작한다.
1929년에 불어닥친 세계공황은 일본에도 큰 타격을 입힌다. 공황으로 인해 일본 본토의 기업들이 속속 문을 닫았으며 도시에 숱한 실업자들이 생겼으며 특히 농업공황도 심각해졌다.
도시에서 실업자들이 농촌으로 돌아오고 누에고치와 쌀값이 폭락하는 가운데 지주들은 농민을 더욱 수탈하기 시작했다.
일본 농가소득이 1926년에 견주어 1931년에 50~60%나 줄어들 정도로 농촌경제가 무너져 내려 버렸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몰락의 길로 치닫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우리의 우장춘 박사는 일본 동경대학 농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기수로 들어가 육종학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밤낮없이 육종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게 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다.
그는 우장춘이라는 우리나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다.
그의 연구결과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우장춘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한다는 이유로 그는 그의 동기들이 모두 승진을 해도 기수에 머무르며 결국 농사시험장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그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인해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도 받고, 명성을 얻었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은 이뤄질 수 없었다.
그가 중국 칭다오 연구소에서 연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일본 농림성의 반대로 일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우장춘은 고노스 농사 시험장에 기수로 승진을 해서 가지만 일본인들이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승진한지 15일만에 고노스 농사 시험장을 그만두게 된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을 나오게 된 뒤 다카이 종묘회사에서 농장장으로 일하게 된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 우리민족이 그렇게 원하던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이때 우장춘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소식을 접하고 그가 일하던 다키이 종묘회사를 보름만에 그만두고 교토대학의 강의도 중단한다.
그는 한국으로 귀국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우리 농민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의 농업을 주도하고 있던 일본의 기술자들이 돌아가버리자 우리나라에서는 종자를 구할 길 조차 막막했다.
우리나라는 우량종자를 만들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을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한때, 우장춘박사와 일한적이 있던 김종이라는 사람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우장춘 박사 뿐이라며 우장춘 박사 귀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그런 우장춘 박사를 호락호락 한국에 보내줄 리 만무했다.
우장춘 박사는 백방으로 한국 귀국을 위해 노력했지만 갈 길이 막막했다.
하지만 우장춘은 한국에 호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하기 전에 우장춘을 호적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국제법상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나라를 조국으로 선택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우장춘박사는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우장춘 박사가 한국으로 돌아온 시기에는 우리 조국은 한마디로 처참한 상태였다.
일제의 수탈 때문에 온 나라를 피폐했으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에도 너무나 바빴다.
게다가 우리나라 내부 세력끼리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바로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남한쪽은 미국이 북한쪽은 소련이 양분해서 통치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일제가 물러나자 우리나라의 경제는 생산이 많이 줄고, 물가가 폭등하는 등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우리나라 경제를 지배해온 일본 자본이 철수하고 기술마저 부족한 상태여서 공업 생산 및 농업생산이 대폭 감소하였다.
또한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자유판매정책도 식량문제를 더욱 악화시켜 농민은 물론 온 국민을 '기아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미곡정책은 돈과 쌀을 가지고 있던 자본가와 지주, 중간 모리배만 살찌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군정은 자유판매제가 오히려 쌀파동만 가져오자 배급제로 바꾸고 여기에 드는 미곡을 마련하려고 미곡공출제를 실시하여 농민에게서 강제로 쌀을 빼앗았다.
나아가 미군정은 악독한 일제시기에도 없었던 하곡공출제도를 실시하여 가난에 찌든 농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유일한 수단인 곡식마저 거둬갔다,
미군정의 정책은 농민을 수탈하는 지주와 모리배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미군정의 잘못된 경제정책 때문에 민중들의 생활은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남한에 살고 있던 미중의 불만과 저항은 날로 커져갔다.
우장춘 박사는 1950년 3월 8일에 한국에 귀국한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남짓할 시기에 우리민족의 아픔인 6. 25전쟁이 터져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나 그가 연구하고 있는 부산 동래시험장은 비교적 안전한 곳이어서 농민을 위해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위해 양이 많으면서 품질이 좋은 볍씨를 생산하기 위해 종자를 확보해 우리국민에게 나눠주었으며, 우리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자급자족이라 생각해 일단은 배고픔을 벗어나보자는 생각을 했다.
시험장의 직원들을 모아놓고 연설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이런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번에 농촌 각지를 둘러보니 우리 농촌은 이대로 가다가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국민의 식생활에 필요한 무, 배추 등 원예 작물을 생산해 내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보니 가는 곳마다 들판에 노란 장다리 꽃이 피었다.
평화로운 농촌풍경일지는 몰라도 먹자고 심은 무, 배추밭에서 노란 장다리 꽃이 피었으니 아무리 고생하고 씨뿌려 가꾼들 소용없다.
우선 무, 배추 종자부터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라면서 우량 종자의 생산체계를 확립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맛은 좀 떨어지더라도 병충해에 강하고 생산량이 많은 종자를 농가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종자를 보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농민들이 담당기관에서 심으라는 종자를 심어도 수입이 나아지지 않자 담당기관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우장춘 박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우리나라의 기술도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씨없는 수박생산에 들어갔다.
씨 없는 수박을 처음 실험 개발하여 생산한 것은 일본의 기하라 박사지만 우장춘 박사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육종학의 원리를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 또 농민에게 한국 농업기술의 선진성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이 씨 없는 수박으로 인해 우장춘은 순식간에 육종학의 마술사가 되어 버려 농민들이 우장춘 박사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우장춘 박사는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가족들도 보지 못했다.
귀국후 일본으로 들어가면 다시 못나올까봐 그런 염려에서였는데 그래서 우장춘은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차 일본에 가지 못했다.
또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해 조의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으로 시험장에 우물을 파서 시험국 직원들에게 바치는 등 우리나라의 농업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민족이 생긴 이래 가장 암울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일본에서 온갖 억압과 차별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공부하여 조국의 농업 근대화에 앞장을 섰으며, 일제 치하 피폐해진 농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고, 전후 망가진 농촌을 일으켰다.
비록 정객 망명자의 아들로 태어나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은 우리민족을 너무나 사랑한 사람이었다.
주요업적
1919년 도쿄 제국대학실과의 농학과를 졸업하였다.그 해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들어 가 1년 후 기수(技手)가 되고 육종학(育種學) 연구에 착수,
1930년 겹꽃 피튜니아꽃의 육종합성에 성공,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였고
1936년 종의 합성설로 모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7년 농사시험장 기사(技師)로 승진했으나 사임하고, 교토[京都] 다키이 연구 농장장 [瀧井硏究農場長]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8 ·15광복 이후에는 교토 근처의 조호사[長法寺]에서 농장을 경영
1950년 정부의 초청을 받고 귀국하여 한국 농업연구소장에 취임하였다.
1952년 농업재건 임시 위원회위원, 이듬해 임시 농업지도요원 양성소 부소장, 그 해 중앙 원예 기술원 원장을 역임하고 다음해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동안 육종학 연구에 전심,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 없는 수박과 벼의 수도 이기작을 연구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부문상을 받았다.
1958년 농사원 원예 시험장장이 되고,
1959년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고 사망하였다.
씨없는 수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우장춘 박사는 씨없는 수박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지역과 기후에 맞는 여러가지 농작물 연구에도 기여하였다.
척박한 강원도의 바위 땅에 그 유명한 '강원도 감자'를 육종시켜 강원도의 특산물이 되도록 하였으며, 제주도에는 '제주도 귤'이 열리도록 하였고, 일본 재래종 채소와 양배추를 교배하여 우리 땅에서 잘 자라며 우리 입맛에 딱 맞는 오늘의 '한국 배추'를 만들어냈는가 하면, 보잘 것 없는 피튜니아를 정원 화초로 적합하게 만든 이른바 '겹꽃 피튜니아'를 발명한 신종의 과학자이기도 하다.
우장춘 기념관
세계적 육종학자인 故우장춘박사의 탄생 1백주년을 맞아 그의 생전 연구 활동 유적지인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2동 850-48번지에 건립한 기념관은 1999년 10월 21일 개관하였으며, 대지면적 3백여평,연건평 73평 규모의 지상 2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1, 2층을 전시실로 구성하였고 야외마당에는 자유천과 우박사의 흉상이 잘 다듬어진 조경시설과 함께 아담하고 짜임새 있게 놓여져 있다.
야외마당에 있는 ″자유천 우물″은 우박사의 모친이 일본에서 임종하였을 당시 정부의 통제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자, 각지에서 푼푼히 들어 온 부의금으로 그 당시 물이 부족한 농장에 우물을 파서 연구소는 물론 물이 부족한 주위사람들과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매일 아침 우물주위를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했다고 하는 우박사의 애정과 얼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전시실 안내
①우장춘박사 초상화
②우장춘박사 약력
③우장춘 박사 주요업적
④연보(환국 전)
⑤연보(환국 후)
⑥환국
⑦한국과학연구소에서 연구활동
⑧한국과학연구소에서 연구활동
⑨한국과학연구소에서 연구활동
⑩자유천에 얽힌 사연
⑪씨없는 수박이야기
⑫연구소에서의 생활모습
⑬연구실 모습
⑭타계전 모습
⑮장례식 장면
①채소산업('50년도 이전)
②과수산업('50년도 이전)
③종의 합성
④겹꽃 페튜니아 육성
⑤원예종묘 생산 적지 탐사
⑥배추 일대 잡종품종 육성
⑦양파 잡종품종육성
⑧일대 잡종이란
⑨원예연구소와 종자산업발달
⑩육종기술의 발달
⑪채소
⑫과수
⑬화훼
⑭우리나라 채소 품종의 변천
⑮유통채소 종자의 변천
안 내
위 치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2동 850-48번지
관람시간 :
- 여름철 (3월∼10월) 09:30 ∼ 18:00
- 겨울철 (11월∼2월) 09:30 ∼ 17:00
관람료 : 무료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공휴일은 익일, 1월 1일, 설날, 추석
전화번호 : (051)550-4489
교통편 :
- 시내버스 : 35번(온천2동∼남부민동), 80번(남산동∼진시장),
110(감전동∼온천장∼동의대학), 210번(사직동∼수영로타리),
301번(사직운동장∼양산 서창)
지하철 : 지하철 1호선 명륜역에 하차하여 세원백화점 건너편에서 3번
마을버스 이용. 명륜 지하철에서 택시 이용시 기본료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