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우씨 醉石室 禹夏永의 향촌사회발전론
醉石室 禹夏永의 향촌사회발전론*1)
―正祖代 향촌지식인의 對華城觀
崔 洪 奎**2)
1. 머리말
2. 향촌사회의 농업진흥과 鄕約 인식
1) 후기사회의 변동과 鄕弊
2) 향촌사회와 「鄕約說」
3. 신도시 華城의 농업진흥론
1) 小農經營論과 懶農廣作 비판
2) 상업적 농업론
4. 신도시 繁榮策과 상업진흥론
1) 華城의 募民策
2) 산업진흥의 배경―市廛과 場市의 설치
3) 小商人중심의 상업진흥과 場市育成論
4) 浦口상업의 진흥책―濱汀浦의 例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후기 수원 출신의 실학자 禹夏永(1741~1812, 자 大猷, 호 醉石室․醒石堂)의 저작과 사상의 개략적인 모습이 1970년대 초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처음 소개된 이후, 이에 대한 관심의 폭이 보다 확대되고 연구의 깊이가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의 일이다.1) 물론 우하
영의 저작 중 일부는 1919년 3월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도서해제 를 통하여 그 존재가 확인된 바 있고, 국내에는 서울대 규장각 <想白文庫> 속에 年紀未詳의 千一錄 10책2)과 별책의 觀水漫錄 下, 水原儒生禹夏永經綸 등 3종이 유전해 왔으나 학술적인 측면에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북한의 경우 1964년 천일록 이 민족고전의 하나로 抄譯本이나마 국역되고, 1983년에 완간된 조선전사 중세편에서는 천일록 의 농업기술론을 비롯한 농업문제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우하영의 사상과 저작의 사료적 가치에 크게 주목하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초 북한사회에서 일기 시작한 농촌경제의 자력갱생 내지 노동생산력 제고를 위한 千里馬작업반운동 등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갖고 이루어진 점도 우선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 뒤 1970년대 후반 일본의 연구자 宮嶋博史에 의하여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농서로서 천일록 이 주목된 이후 1980년대 중반 김용섭에 의하여 이 농서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남․북한과 일본학계에서는 주로 천일록 의 농업론에 대하여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농업문제 인식 또한 단편적이고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천일록 을 비롯한 별책 관수만록 하․ 수원유생우하영경륜 등 우하영의 전 저작에 대한 전반적이고 구조적인 검토는 80년대 말 필자의 연구에 의하여 비로소 본격화된 바 있었다. 특히 당시까지 학계에서 우하영이라는 近畿地域의 학자가 수원유생일 것으로만 막연히 알려져온 현실에서 그의 家系․향촌․묘소 등이 필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혀짐으로써3) 그 출신․黨色․學脈 등을 고려한 그의 學風․사상의 全体相을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조 20년(1796) 4월 국왕의 求言綸音에 대한 應旨呈疏 때 별책으로 제출된 수원유생우하영경륜 의 저자는 영조 17년(1741) 2월 1일 경기도 수원부 好梅折 於良川面 外村(현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의 몰락한 남인계 가문에서 태어나 불우한 삶을 영위해온 재야학자였음이 밝혀졌다. 그는 조선중기 李滉의 門下에서 柳成龍과 同門修學한 성리학자이자 南人의 領袖로 활약한 秋淵 禹性傳(1542~1593)의 직계 7대손으로 천일록 ․ 관수만록 등을 저술하고, 7대조인 秋淵의 유고 癸甲日錄 의 간행 주역을 맡아 남인계의 선배학자인 晩年의 李瀷과 당시 華城留守였던 蔡濟恭에게 각각 後序․墓碣銘과 諡狀의 집필을 부탁했던 장본인이었음도 확인되었다.4) 추연은 일찍이 수원현감을 역임한 뒤 선조 24년(1591) 북인의 책동으
로 관직을 削奪당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고지인 수원지방에서 起義, 의병장으로 金千鎰과 함께 수원․강화 등지에서 戰功을 세워 大司成에 特進된 바 있었다.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서의 활약상은 일제 초기 그의 신도비가 수난을 당하는 단서가 되었으며, 그 후 매송면 숙곡리 묘소 입구에 재건립된 ‘추연선생신도비’에도 星湖의 碑銘에 덧붙여 선조의 업적을 현창하는데 힘쓴 우하영의 역할이 간략히 기재되어 전해온다.
우하영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수원 서쪽 南陽灣의 주요포구의 하나인 濱汀浦 부근 七寶山 아래에 위치한 현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 향촌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생애를 보내는 가운데 필생의 작업으로 천일록 을 집필하는데 시종하였다. 그의 對사회적 활동은 18세기 말 正祖의 수원 신도시건설과 화성 축조에서 큰 자극을 받아 정조 20년(1796)의 「丙辰四月應旨疏」와 순조 4년(1804)의 「甲子二月應旨疏」 등 두 차례의 국왕의 求言綸音에 대한 應旨疏를 통하여 그의 존재와 경륜이 처음으로 朝野에 드러났다. 富國裕民․民生補資의 이상이 담긴 그의 時務論의 편린이 정조․순조실록과 日省錄 ․ 備邊司謄錄 등 연대기자료에 등재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의 학문적․사상적 본령은 농업을 비롯한 상공업․광업․어업 등 산업 문제에 있었으며, 풍속․지리․군사․교통운수제도 및 운영상의 문제에서 향촌사회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대가 당면한 제문제에 대한 개혁책을 역사주의적 관점과 실증적 연구방법으로 제안한 전작체계 천일록 속에 담겨져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백과전서적인 저술 속에는 16세기 이래 李珥․趙憲․許曄․柳成龍․李晬光․柳馨遠 등의 시무론적 경세사상과 李瀷에서 開花된 近畿南人의 중농 학풍을 수용, 이를 실천적 측면에서 적용하려는 보다 현실주의적 관점이 주류를 이룬다.5)
우하영의 저작 가운데 크게 돋보이는 부분은 첫째, 小農의 입장에서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 등 개혁적인 농업론을 모색하려한 점, 둘째 과거제․군제 및 군정․신분제․전제 및 전정․환정 등 정치․사회제도상의 개혁론을 개진하려 했고, 셋째 정조대 현안의 역사적 과제로 추진된 신도시 건설과 성곽 축조 등으로 空前의 변화에 직면했던 자신의 향촌인 화성지방의 발전을 위한 지역개발론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성을 중심으로 한 그의 향촌사회발전론은 정조 중엽에서 말엽에 걸쳐 추진된 국왕 주도하의 華城경영 문제와 결부되어 18세기 말 화성 향촌민의 입장과 향촌사회의 변화와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크게 주목되는 부분이다. 18세기 말의 신도시 화성경영은 정조가 집권 중반 이후 말엽에 이르는 11년간의 걸쳐 그의 정치적 이상이 담긴 역사적인 사업으로 주력했던 만큼, 국왕의 對화성정책에 대한 향촌지식인의 반응과 지방사적 측면에서 사회경제적 실효 여부를 가늠하는데도 하나의 지표를 제공해 주리라고 전망된다.
2. 향촌사회의 농업진흥과 鄕約인식
1) 후기사회의 변동과 鄕弊
조선후기 사회, 특히 우하영이 살던 18세기 말은 기존의 체제․산업․사상․습속 등이 여러 부문에서 이완․해체되고, 새로운 질서․사상의 모색을 통하여 근대사회의 전환기적 動因도 아울러 움트던 시대였다. 특히 사회신분제의 변동은 봉건적인 위계질서에 의해 운영되던 향촌사회를 크게 변모시키기에 이르렀다.6) 이러한 사회동요에서 파생된 일부 양반층의 몰락과 평․
천민의 신분상승 등 계층간의 갈등과 利害가 대립되어 농촌공동체의 분위기는 물론 농업생산력의 유지․향상을 위해서도 시급히 대응해야 할 농정상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천일록 의 저자가 자주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시대 근기지역 농촌에서는 사회기강이 해이되어 懶農과 遊手者가 속출하고 있었고, 鄕弊 또한 다양하였다.
우하영이 관찰한 농촌은, 자신의 향촌인 수원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도처에 걸쳐 대부분 離農과 頹俗, 懶農 풍조가 만연된 敗村窮巷 바로 그것이었다.7) 농업 문제에 국한해 볼 때도, 당시 근기농촌에서 일반화되고 있던 小農들의 농촌 遊離와 비생산적인 懶農 풍조 외에도 날로 심화되고있던 反사회적․反농촌적인 각종의 鄕弊였다. 그는 후기사회 각 부분의 폐단을 廉防․譜弊․鄕弊․幕弊․營吏弊․京鄕營邑 軍校弊․蔘弊․軍木弊․學校弊․山地廣占弊 등 11조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위기의식을 환기시킴과 아울러 그 處防箋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 예의 하나로, 우하영은 당시 향촌사회의 질서와 풍습이 문란되고 偸薄하게 된 주요 이유가 국가에서 권장한 空名帖 실시에 있다고 보고, 그 폐단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친족과 이웃이 죽어가는데도 일찍이 升斗의 곡식을 서로 돕지 않고 오직 官에 곡식을 가져주고, 공명첩 얻을 계책만 하니 민속이 투박하게 된 것은 오직 공명첩에서 말미암은 것이다.8)
納粟空名帖은 본래 壬亂 후 식량조달책으로 마련된 것이었으나 이후 흉년이 들 때마다 納粟授職은 더욱 확대되어 常民에게도 남발될 정도였으며,9) 또 각종 기록에도 해당 吏屬들과 결탁
하여 ‘납속’이라 쓰지 않고 단지 ‘通正’만 쓴 결과 당시 신․호역에 응하는 무리는 10여 호에 불과한 형편이었다.10) 이러한 공명첩은 우하영이 천일록 집필에 착수하던 正祖代에도 그 수가 더욱 늘어나, 재위 24년 동안 무려 23,310개가 발급될 정도였다. 그리고 우하영에 의하면, 그 값은 단지 10여금에 지나지 않아 그 이상을 꾸릴 수 있는 형편의 민인들은 金玉을 내고서 가만히 앉아서 軍保에서 면제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군보․賤隸의 면역 특혜는 향촌사회 내에 폐습을 더욱 조장시켜 급기야 몰락한 班族을 凌踏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명분 또한 크게 추락하여 殘班․상민층 간의 갈등과 사회기강이 문란해지는 등 사회문제를 크게 야기시키는 것으로 인식하다.11)
공명첩의 폐단에 대한 인식과 함께 우하영은 당시 향촌사회 내에서 財富의 경제력에 따라 신분분화와 鄕職이 점유되는 등 賣鄕과 儒鄕分岐, 향촌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新․舊鄕 간의 鄕戰이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깊이 우려하였다. 그에 의하면, 후기 향촌사회의 질서와 鄕網을 무너뜨리게 하는 또다른 현상은 留鄕所 운영에 있어서 賣鄕과 差任을 도모하는데 따른 鄕任과 官屬의 不法作弊였다. 당시 향촌사회에서 鄕任差帖을 얻기 위하여 소를 팔아서라도 지방정부에 납속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듯하다. 가난하고 우매한 백성이 아니면 모두 향임을 칭하고 앉아서 군역을 면하려고 한 까닭에,12) 軍保는 모두 虛錄되어 軍額은 갈수록 부족해질 뿐만 아니라 요역은 힘없는 소농민에게 더욱 편중되는 등 民弊가 극심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13) 이러한 현상들은 대부분의 지방에서 사족양반으로 대표되는 舊鄕이 서원과 향약 등을 바탕으로 鄕論을 주도한데 대하여, 서얼․평민 출신의 양반으로 대표된 新鄕은 유향소를 근거로 부세를 관장하고 수령을 보좌하면서 스스로의 권익과 지위를 상승․증대시키는 과정에서 이른바 鄕戰이란 이름으로14) 갈등을 빚던 현실과 일정하게 照應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문란한 향촌질서와 향폐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하영은,
국가에 기강이 있음은 사람에게 혈맥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사람에게 혈맥이 없으면 운동할 수 없고,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制治할 수 없다.15)
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향폐에 대한 방지와 해결책으로, 국법으로 조목을 嚴立하여 준수하도록 守宰에 의한 강력하고도 공평무사한 對民統制를 촉구하였다. 또한 무엇보다도 해이․문란된 후기사회의 붕괴적 현상과 이에 부수되어 懶農과 遊愘의 기풍이 만연된 농촌공동체를 결속시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킨다는 목표 아래 勸農政策과 민습을 교화하기 위한 勸農節目과16) 鄕
約을 구상․입안하기에 이르렀다.
2) 향촌사회와 「鄕約說」
조선후기사회가 변동을 겪게 된 것은, 사회신분제의 변화 외에도 상품화폐경제와 농업기술․농업경영의 발전 등 제요인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결과이지만, 이에 부수되어 향촌사회 내부에서는 농민분해로 인한 소․빈농층의 농촌 遊離가 가속화되고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우하영이 관찰한 대로 각종의 향폐가 표면화되자 이를 위기적 상황으로까지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후반 海州․平山 등지의 읍에서는 栗谷鄕約이 立定 시행된 바 있으며,17) 이것으로 인해 후기사회에 이르기까지 賣鄕․圖差의 폐단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 하면서, 향약을 통하여 향폐를 근절시킨 실례를 제시하였다. 우하영이 구상한 향약의 기능은, 향촌사회 내에서 頹風에 물든 비생산적인 습속을 순화하고 각종 향폐에 대한 정부와 지방관의 적극적인 대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농민의 보호와 농업생산력의 제고하는 차원에서 또 권농정책이 전제된 농촌공동체의 향촌자치조직으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향약을 구상, 입안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우하영이 수원향촌에서의 시행을 목표로 「鄕約說」이 입안되기 이전에도, 같은 근기지역인 廣州지방에서도 順菴 安鼎福에 의해서 二里洞約 이 제정 시행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영조 32년(1756) 순암의 나이 45세 때 자신의 향리인 慶安面 二里에서 시행하기 위해 立定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향약의 하나이다.18) 순암은 이 동약의 서문을 통하여 “가까
운 것과 적은 것으로부터 천하에 미친다”는 관점에서 풍속교화와 政令의 이행은 촌락사회의 단위를 중심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한 아무리 聖王이라 할지라도 백성을 교화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당대에 만연되고 있는 퇴풍과 악습이 근본적으로 집정자들이 “횡포를 자행한 결과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풍습이 투박해진다”고 보고, 민심을 순화시킨 연후에 敎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9) 그리하여 呂氏鄕約이 나타난 사회적 배경을 참고해볼 때 “퇴폐한 민심을 단결로 이끌기 위해서는 오늘날 향약을 시행함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다”20)고 민심수습과 향촌사회의 결속을 위한 풍속교화와 통제의 필요성을 밝혔다.
순암은 향약의 실현을 위하여 그 하부조직을 比․閭단계를 거쳐 ‘風約’을 실현하고, 그 상부조직으로 洞․面․鄕에 이르기까지 4단계로 구성할 것을 착상하였다.21) 순암은 일찍이 下學指南 에서 朱子增損呂氏鄕約 과 李滉․李珥․鄭逑․黃宗海( 木川鄕約 )의 향약을 예거하면서 지방적 특성이 담긴 향약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향리에 은퇴한 후 隣保的인 자치조직으로서의 기능과 실효성을 전제로, 5家統을 核으로 里․洞에 있어서 각각 風約과 洞約(洞契)을 양분하여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22) 그가 입정한 이리동약 은 광주 향촌에서 양반과 상․천민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상․중․하 合契의 조선후기의 특성이 담긴 향약의 하나이다. 이는 수원향촌에서의 시행을 전제로 한 우하영의 「향약설」보다 약 30여년 정도 앞서 제정, 시행된 것이었다.
근기학파의 실학자로서 순암보다 20년 後生인 우하영의 「향약설」은 1780~90년대의 피폐된 농촌사회의 鄕風振作과 化俗策으로 입안된 것으로, 이는 수원향촌에서의 시행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 편제는 忠孝相勉․德業相勸․禮俗相交․過失相規․患難相恤 등 5개 조목과 各洞節目․都憲節目 등 洞約에 관련된 2개 절목, 그리고 前代 名賢들의 향약 논의가 첨부된 附名碩議로 되어 있다. 「향약설」은 첫머리에서 正風俗․得賢才의 목표가 여씨향약에서 비롯되었음을 전제하고, 퇴계․율곡․반계의 향약을 계승한 것으로23) 밝혀 놓았다. 그러나 그 체제와 내용은 매우 면밀한 것이어서, 종래의 다른 향약과는 달리 충효상면조를 신설, 이를 서두에 넣어 새롭고도 독특한 향약으로 立條하였다. 충효의 권면을 제1조로 삼은 것은 유교적 윤리에 입각하여 君父師에 盡力함으로써 ‘世降俗偸’에 대한 ‘警世相勉’의 방책으로 삼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24) 또한 여씨향약 이래 기존 향약의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등 4개 조목을 변용, 충효상면을 제 1조로 넣고, ‘예속상규’를 과실상규보다 먼저 입조하고 있음은 향약의 제도가 대개 禮俗․敦風을 빛내려는 뜻에 있고, 또 예속이 이루어진다면 과실이 자연 적어질 것으로 예상한 때문이었다.25) 이러한 우하영의 의도는 당시 향약의 기본취지가 ‘守分之風’의 敎化振作․체제유지라는 차원에서 官 주도하의 鄕民을 규제하려는 태도를 지양, 순수한 향촌민의 입장에서 相扶相助를 강조하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制治之具’로서의 의미보다는 ‘導俗之具’의 차원에서 향약을 인식하려 했다는데 그 의의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우하영은 향약의 約任에 있어서도 邑=都憲 1인․副憲 2인, 洞=洞憲․執網․公員 각 1인을 두었으며, 각읍과 각동의 上下二元的인 구조로서 향약을 구상하였다. 먼저 각읍의 約任인 都․副憲은 鄕規의 예에 따라 校中齊會하여 뽑고, 각동에서는 동헌․집강․공원을 洞約의 예에 의거 향촌공동체를 구성하는 대․중․소, 전지역민의 참여하에 선출하는 등 上下一元的인 방식를 제시하였다. 또 상․중․하계의 구성원에게는 班常을 고려한 신분질서에 따라 합리적인 상벌조목을 제시하고 老病者와 여성 등에게도 그에 알맞는 罰課를 적용하는 등 매우 적절하리만큼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이처럼 우하영은 「향약설」을 통하여, 당시 사회신분제의 해이로 鄕弊와 邪風이 조장되고 분열되어가는 향촌사회의 붕괴적 양상에 대처, 향약을 향촌민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농촌공동체의 협동적 조직으로서 그 기능과 역할을 다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소농민의 입장에 서서 鄕民의 고통을 생각하고 대변하려는 그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연유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농민해체로 인한 소농층의 농촌이탈이 일반화되고, 懶農과 雜技․遊愘의 풍조가 만연되는 농촌현실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농촌지식인이었던 그에게는 매우 우려할 만한 비생산적․反농업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향약을 隣保와 相助의 美風을 진작시키는 향촌사회의 협동적인 자치조직으로 作動시키는 일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소농민의 입장에서 위기에 직면한 소농민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이었으며,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 國富를 도모하는데 기본바탕이 된다고 인식하였다.
우하영은 남양만 부근에 있는 수원향촌 一隅에서 몰락한 班族으로서 소농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며, 農家摠覽 ․ 田制 ․ 建都 附山川風土關扼 등을 저술할 만큼 농업이론에 정통하고 농민생활에 깊은 이해자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26) 그처럼 그가 향약의 입안은 통하여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協業과 勤儉力穡하는 농촌기풍을 진작시키려 했음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향약이 당시에 표면화되고 있던 각종의 향폐를 제거하는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민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일면 統制, 일면 협동이라는 향촌사회 내의 강력한 자치협약기구로서 소농민을 중심으로 한 상․중․하계의 향촌민에게 裨益이 되도록 배려하는 등 민본주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우하영의 향약은 30여년 전 광주향촌에서 시행된 순암의 「이리동약」이 상․중․하 합계의 후기 동약으로서의 특성을 지닌 점, 향촌사회의 인보적인 자치기구로서 관부가 수행해야 할 기능에 보조역할까지 갖춘 점27)등과 비교할 때 같은 근기남인계 실학자로서의 對民의식과 향촌사회관의 공통성을 엿볼 수 있다. 우하영 향약의 5개 조목과 「이리동약」에서 여씨향약의 4개 조목에 대한 附條를 덧붙여 후기 향촌사회의 현실성을 배려한 점, 특히 향약 속에 상부상조의 인보적 성격을 강화하면서 민본주의적 시각에서 신분적 제약을 크게 완화, 그 施惠를 균분해서 향유하려 한 점 등은 크게 돋보이는 부분이다.
3. 신도시 華城의 농업진흥론
1) 小農經營論과 懶農廣作 비판
18세기 말의 李重煥은 살 만한 땅의 입지조건으로서 6가지의 지리를 예거했거니와,28) 기후․
지형․토질의 沃瘠 등은 그 지역의 농업환경․농업관행․농업지대로서의 성격․양상을 특징짓는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적 특성과 농사관행은 農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조선전기의 農事直說 ․ 撮要新書 가 삼남의 농업기술체계를 반영한 농서라면, 姜岢孟의 衿陽雜錄 은 시흥을 중심으로 한수 이남 중부지방의 농법과 농사관행이 담긴 농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18세기 말 수원지방의 지역적 농업특성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천일록 의 농업론은, 경기지역의 소농경영과 농업기술체계․농사관행 등을 중심으로 엮어져, 전기의 금양잡록 과 일정한 전통적 계승․照應관계를 갖고 있음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29)
천일록 을 구성하는 「농가총람」․「전제」․「건도 부산천풍토 관액」과 별책 「관수만록」․「수원유생우하영경륜」등은, 조선후기 수원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역의 농업기술 수준과 농업경영․농사관행 등을 담은 전문성 있는 농서이거나 농업관련 저술들이다. 특히 「농가총람」은 전국 차원을 목표로 하되 수원지방의 농업특성을 전제로 우하영의 노동집약적인 小農經營論과 精農思想을 담은 농서이다. 이 농서는 山林經濟 를 포함하여 기존의 농서들이 농사직설 이나 농가집성 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18세기 이래의 새로운 농법과 재배기술을 수용, 저자의 체험적 농업론을 농업개혁의 차원에서 극복하려고 한 것이 특색이다.30) 그 내용면에서 「농가총람」은 耕種法․농지이용론․耕地法 ․施肥論 ․除草論 등 농업기술면에서 조선시대 농서의 교과서로 널리 인식되어온 농사직설 의 한계와 결함을 극복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농학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은 조선전기 이래 17세기 말까지 삼남에 비하여 토지의 비옥도와 농업기술면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며, 특히 수도작의 경우 그 토지조건과 재배기술은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31) 따라서 수원지방의 농업생산방식과 농업관행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던 우하영은, 천일록 의 집필을 통하여 보다 실천적이고 선진적인 농업기술․농업경영․농업정책론을 모색하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전국에 걸친 山川遊歷과 현지답사를 통하여 각 지역의 농업실태와 관행을 조사, 자연․인문환경과 선진농업기술을 비롯한 상업적 농업 등 각 지역의 농업지대적 특성과 장점을 소개하였다. 그의 농업지리서라고 할 수 있는 「건도 부산천풍토관액」은 畿甸(경기)을 중심으로 北關․西關․海西․關東․嶺南․湖南․耽羅 등 각 지역의 군현별 민속․농업․生利 등을 산업지리적 관점에서 생생하게 기술하였다.32)
우하영은 이 저술에서 전국의 지역별 농업환경과 관행을 관찰하고 토지의 비옥도와 농사절후의 早晩, 전답의 비율과 재배작물의 경종방식, 제초와 시비․수리문제, 주곡생산물 외의 농가부업 등을 조사하였다. 지역별 농업관행을 파악함에 있어서는 어느 경우에나 그 지역에 따른 토성의 肥瘠과 농민의 勤惰 여부를 대비시킴으로써,33)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이 기본요건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이 농서는 조선후기의 경기지역, 특히 수원지방의 낙후된 농업기술과 경영형태, 척박한 토성, 移秧廣作과 懶農風潮 등을 개선되어야 할 결점으로 지적․비판하였다.
13두락이지만 수원향촌에서 직접 소농경영을 영위하면서 노동력 투하를 통해 정경세작의 집약농법을 지향하고 있던 우하영이 경험하고 관찰한 수원지방의 농업현실은, 결코 발전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타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많은 문제점을 지닌 고장이었다.
(수원의) 농업은 모두 懶農이다. 밭에는 보리와 콩을 심는다. 오로지 벼농사에 힘쓰며 廣作한다. 직파를 적게 하고 注秧(이앙)이 많다. 토지는 척박하고 조세는 과중하며, 백성들은 원대한 계획이 없다. …… 밭은 一牛耕이며, 거름을 주지 않고 또 深耕하지 않기 때문에 수확이 아주 적다. 농촌에는 부유한 집이 드물다.34)
우하영에 의하면, 화성부는 토성이 척박하고 이앙광작이 성행하며, 전답에 거름도 잘 내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초에 있어서도 올벼(직파)는 2~3회, 秧田은 1회에 그치는 등 나농광작의 풍조가 성행하는 등 수도작의 농업기술이나 농업관행에 문제가 많았다. 밭은 一牛耕으로 秋麥播가 중심을 이루고, 콩 그루갈이 등 1년 2작이 보통이며, 다른 경기지역이 그렇듯이 稻麥 수전2모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다른 저술에서도 우하영이,
기전 가운데에서도 본부(화성)의 토성 또한 여주․이천․용인․안성 등 열읍보다 떨어지지만 田賦는 오히려 다른 읍보다 매우 무겁다.35)
고 지적했듯이, 조세 또한 토질에 비하여 너무 과중하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우하영이 관찰한 바로는 경기지역의 토성은 삼남은 물론 兩西 지방보다 아래였으며,36) 耕․
제초․糞田 등에 소홀하고(나농), 특히 문제는 수리와 토지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앙광작만을 농사로 삼는데 있었다. 따라서 17세기 말 이후 수원지방에서 성행한 이앙광작은37) 강수량이 적당하거나 시설이 가능한 경우에는 실효를 거두지만, 가물 때는 旱災를 입어 민인들이 遊離하는 단서가 된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18세기 말 당시 수원지방에는 萬石渠․萬年堤․祝滿堤 등 대규모의 수리시설이 축조되고, 또 23개를 헤아리는 기존의 중소 제언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되고, 화성부를 비롯한 아문둔전도 곳곳에 설치되는 추세에 있었다.38) 이러한 수리시설의 축조와 둔전경영, 그리고 농업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이앙법 중심의 수전농 경작체계가 주류를 이루고, 광작경영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그 문제점도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약적인 소농경영론자였던 우하영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앙법의 장점인 수확량의 증대와 제초회수의 감소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아니라 나농광작의 폐단, 곧 전체 농업생산력과 직결되는 토지생산성의 저하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천일록 에서 개선해야 할 농업론으로 거론한 당시 수원지방에서 행하여지던 나농과 광작의 페단은,
근래 민심은 힘써 부지런히 농사지을 계책은 하지 않고 오로지 광작하는 것을 농사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몇 식구 안되는 집에서도 모두 수석락의 논을 부친다. 그래서 畓主로 하여금 失利케 하고, 그 자신은 영리를 얻는다. 이는 참으로 요즈음의 큰 병폐이다.39)
라는 지적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앙법이 제초회수의 감소와 수확량면에서 선진농법임에는 틀림없으나, 흔히 광작경영으로 1회의 제초로 그치거나, 시비를 게을리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지력의 쇠퇴로 토지생산성을 떨어뜨려 농업생산력의 감소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그의 농업개선책은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지겸병과 광작경영이 비판받는 또 다른 이유는, “소위 겸병자는 1호의 농가가 數三戶分의 경작지를 倂奪하여 수삼호의 窮民을 경작할 땅조차 없게 만들고 만다.”40)는 지적
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소수의 戶에 의한 토지소유나 경작지 독점은 소농민층의 농민분해와 流民化의 큰 단서가 된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로써 우하영과 같은 소농중심의 노동집약적인 精農思想의 입장에서 보면, 토지생산성을 저하시키는 나농 광작자나 겸병자류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18세기 말 당시의 농업현실은 비단 신도시 화성지방 뿐만 아니라 타지역 농촌에서도 일반화된 현상이었으며, 토지겸병과 광작농의 성행으로 소농층의 토지이탈과 소농민간의 치열한 차지경쟁을 유발시켜, 정조대에 洪川유생 李光漢 등의 貸田論이 제안되는 계기도 되었다.
앞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우하영의 농업론은 자신의 향촌인 신도시 화성농촌에 대한 성찰에서, 그 입론이 비롯되는 등 지역적 특성이 짙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남을 비롯한 선진농업지역의 농업기술․농업경영을 항상 대비시키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 고장의 대다수 농민들의 생계를 걱정하고, 향촌과 나라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농업이론가로서의 실천적 의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저작 관수만록 은 移邑 후 행정․산업․성곽 축조 등 제문제를 향촌민의 시각에서 다룬 매우 귀중한 자료이거니와, 18세기 말 수원지방의 농업개혁을 위한 時務論도 이 책 여러 곳에 펼쳐져 있다.41)
조선시대에 있어서 국가재정과 산업의 기본토대는 물론 향촌사회의 주된 생산활동이 농업이었던 만큼 천일록 이 차지하고 있는 농학사상의 의의는 물론 지방사적 측면에서도 그 비중이 작다고 할 수 없다. 농학사적 측면에서 천일록 의 농업론은 15세기 시흥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의 농업기술체계를 기술한 금양잡록 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특히 18세기 말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의 농업형태와 소농중심의 농업경영론을 특징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다.
우하영의 농업론은 전국을 대상으로 그 시대 농업문제 전반을 포괄하고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수원을 중심으로 경기지역의 지방적 특성을 고려하면서 그 이론을 실제 농사현실에 적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적 특성은 농민경제의 안정화와 향촌사회의 발전이라는 측면이 고려된, 즉 향토애와 농민의식이 모든 立論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천일록 의 농업론은 농업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을 포괄하려고 하였다. 또한 입론의 주체를 소농민에 두고, 그 입장에서 농민생활의 안정을 기하고 새로운 농업기술과 합리적인 농업경영의 적용을 통하여 그의 시대와 향촌사회의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도모하려는데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보다 그 의미를 간추려서 말한다면, 우하영의 농업론은 노동생산성을 중시하는 가운데 토지생산성을 제고하려는, 즉 소농중심의 집약적인 精耕細作의 정농사상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상업적 농업론
18세기 말의 수원지방은 정조 13년(1789) 읍치를 옮겨 대대적인 신도시가 건설되고, 역사적인 화성 성곽이 축조되었으며, 화성행궁을 비롯하여 관아․객사․향교․군수고․창사 등과 민가․상가들이 서둘러 건축되고, 도로․교량․驛站․店幕․정자 등 대규모의 도시기반시설이 영건되었다. 뿐만 아니라 市廛과 남․북장시가 설치되고, 만석거 등 3대 제언이 수축되는 등 도시규모와 산업기반시설면에서 공전의 대변화와 도시적 발전을 거듭하였다.42) 화성부 주위에
는 남양․용인․양지․죽산․안성․이천․음죽 등 곡창지대가 점재되어 있고, 각 지방마다 5일장시가 속속 개설되면서 점차 수원은 중부권의 중심도시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특히 이곳 장시에는 쌀․어염․소․채소․담배․종이 등의 집산과 교역량이 많았다.
18세기 말 화성이 근대적 상업도시로서 발전하던 시점은 또한 전국 차원에서 상품화폐경제의 진전과 농업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먼저 쌀과 같은 주곡의 잉여생산물이 상품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수원부지역 내의 민인들이 돈을 마련하는 방법을 오로지 농곡에 있다. 농업 중에서도 가장 힘쓰는 것이 禾農이다. 그래서 시장에 나오는 것이 모두 쌀이다.43)
이것은 당시 수원 향촌에서 주곡인 쌀의 상품화가 대다수 농민들의 주수입원임을 밝힌 대목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화성부 외촌의 농업사정과 경제형편에 대하여 “농곡으로 돈을 마련하는 까닭에 촌간에서 빚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장리뿐이다”라고 밝힌 대목과 일치, 대다수 수원 향촌민들이 미곡의 일부를 시장에 내다 팔아 用錢을 마련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시기 농업생산 분야에서 변화발전의 큰 계기가 된 것은, 도시 주변 농민들이 채소․담배․고추 등의 작물을 재배, 이를 상품화하면서부터였다. 쌀의 상품화에 있어서 여주․이천지방 농민들은 올벼(早稻)를 재배하여 많은 소득을 올렸고, 용인에서 재배하는 인삼은 ‘龍蔘’으로 불려지면서 담배와 함께44) 중부지방 일대의 장시에서 널리 거래되었다. 수원의 도시적 발전과
함께 주변 농촌에서는 시장을 상대로 채소․담배․목면․마포․모시․양잠 등 상업적 농업을 專業으로 삼는 농가도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농작현실을 배경으로 우하영은 주곡 외에 배추․무․미나리 등 소채 같은 상업성 있는 농작물의 재배를 권유하는 등 상업적 농업의 필요성을 적극 권장하였다.
大城名都 등 사람은 많고 토지가 적은 곳은 그 資利하는 방법이 본래부터 허다하다. 수전으로 벼 10두를 뿌리는 땅에 미나리 2두를 심으면 전 10두락의 利를 획득할 수 있고, 한전으로 보리 10두를 심는 땅에 채소 2두를 심으면 맥전 10두락의 이를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근년 이래로 미나리와 채소를 싣고 府內 팔러가는 都下民人이 도로에 이어지고 있다. 대저 治圃․種芹을 업으로 삼는 자는 불과 10여 두락의 밭이나 불과 3, 4두락 논이면 5, 6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 보리나 벼를 농사하는 자는 수일경의 밭이나 10여 두락의 논으로도 4, 5식구의 식량조차 힘들다. 모두 흙을 갈아먹고 사는 것인데. 획득하는 利가 이렇게 틀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45)
이로써 ‘人多地狹’의 도시 근교의 농민들이 그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하여 벼 대신 미나리․보리․밀 등 도시민의 부식 수요에 알맞는 특용작물을 재배한다면, 작은 토지 경작조건하에서도 곡물보다 몇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상업적 농업의 장려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변화하는 시대현실을 수용하면서 대다수 소농민의 資生之方과 농촌경제의 진흥을 염두에 둔 소농중심의 농업관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우하영은 또한 자영농이 아닌 借地병작자의 경우에도 농작물의 선택 재배는 경작자의 자율에 맡길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민전의 경우는 물론 정조 18년(1794) 화성성역 기간에 수축된 장안문 밖 만석거의 수축과 함께 설치된 大有屯(北屯)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당시 화성부를 지주로 삼고 府의 외촌 농민들에게 주로 분급해 주는 관행을 개선, 신입한 성내 민인들도 둔전 경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경작조건의 확대를 제안하였다.
만약 전세를 가볍게 하여 작인들에게 주어 각자 편한 대로 작업을 하게 하고, 올벼를 심든 늦벼를 심든, 미나리나 무를 심든지 마음대로 경작케 하여 편의에 맡긴다면 백성들은 쉽게 따를것이니, 그것에 의하여 생업을 삼는 자는 1백 농가를 훨씬 넘을 것이다.46)
이것은 성내 농민들의 자활책도 될 뿐더러 그 재배작물의 종류도 그 資利에 따라 경작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소농민의 生利를 위하여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하였다.
우하영의 농가부업 또는 상업적 작물에 대한 필요성과 인식은, 양잠․목면․모시․생강․양봉․돗자리․닥나무․옻나무․대나무 등으로도 그 종류가 확대되었거니와,47) 다만 담배의 재
배에 대해서만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담배가 당시 對淸무역의 활발한 전개와 국내수요가 증가됨에 따라 그 재배풍조가 과열되어 있었으므로, 전국의 ‘良田沃土가 南草田化’하는 농업현실을 깊이 우려한 결과였다. 아무리 수익성있는 상업적 작물이라 할지라도 기호품인 담배의 과열된 재배로 인하여 농곡의 경작 면적이 감축되고, 아울러 곡물 생산도 감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바로 ‘禁煙草’의 이유였다.
상업적 농업에 적극적인 입론을 펼친 우하영이 다만 담배 재배에 대해서는 “일체 엄금하여 국내에서 그 종자를 永絶시켜야 한다”는48) 금연초론자가 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즉, 담배의 편중된 재배가 일용작물인 쌀과 잡곡의 생산을 감축시킨다는 논리 이외에도 당시 광작농의 확대로 소농층의 토지이탈이 가중되던 현실에 비추어보면, 소농 중심으로 집약적 농업경영론을 주장하고, 향약과 권농정책 등 농촌공동체의 결속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도모하려던 우하영의 농업진흥론의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견해라고 해석된다.
4. 신도시 繁榮策과 상업진흥론
1) 華城의 募民策
이읍과 화성 축조 후의 신도시 화성부가 상업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첫번째의 과제는 그 구성원인 府民을 募聚․충원하는 일이었다. 신도시 건설 초기부터 정부와 당로자들 사이에서 이주와 민생대책을 비교적 상세히 강구하는 가운데, 도시 번영과 발전을 위한 상공업자들의 모취와 육성책을 여러 경로로 논의한 바 있었다.49)
수원 향촌에서 이읍과 화성성역의 전과정을 목격했던 우하영은 자신의 지역사회가 신흥대도회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첫째 도시의 중추적 기능을 지닌 각 산업 분야에 종사할 민인을 먼저 모취하고, 둘째 읍민의 생활안정을 위한 민생대책 수립, 셋째 교육을 통한 주민교화 등을 신도시가 당면하고 해결해야 할 주요 급무로 꼽았다.50) 우하영은 民人募聚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화성을 樂土로 인식할 수 있는 도시환경의 여건을 마련하고, 각종 행정시책의 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신도시 건설 초기인 정조 13년(1789)부터 동왕 24년(1800)까지 정조는 11년간에 걸친 화성경영 기간에 화성과 용인․진위․안산․시흥․과천 등 인근 속읍민에 대한 신․호역과 환곡의 감면, 지방 초시에서 본시에 이르는 문․무과 별시의 시행, 품계의 加資와 賑恤 등 여러 가지 대민정책을 수시로 베풀었다.51) 이러한 대민 특별조치에 부수되어, 이읍 초부터 수원부 외촌이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避役의 무리가 적지 않았던 듯, 당시 우하영이 관찰한 대로 그들은 성내 주민들의 신․호역을 침해하거나 외촌에 도망하여 피역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었다.
이제 都下에 유입된 백성들을 살펴보면, 모두 8도에서 피역을 하고자 온 무리가 대부분이다. 지금 만일 本府에서 성내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허락하여 신․호역을 추궁하지 말기를 정하여 그 절목을 만들게 하고, 본부의 외촌으로부터 옮겨온 자로 하여금 각기 그 해당 부처에서 바로 부과된 역을 감면시켜 주며, 각 읍으로부터 옮겨온 자는 각기 그 거주하던 곳의 官으로 하여금 바로 그 소정의 역을 감면케 해준다면, 몇 해 안가서 성내에는 민호가 충만해질 것이니, 반드시 땅이 좁아 용납하기 어렵다고 탄식하게 됨이 있을 것이다.52)
이러한 부 관할하의 외촌이나 타지역 각읍에서 유입해온 민인들에 대한 피역대책은 당시 심각한 행정적․사회적 문제로 떠올랐고, 그 대책 또한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우하영이 피력한 피역대책의 요지는, 일단 부내로 이주해온 민호에 대해서는, 신․호역을 관장하는 해당 관부에서 일단 면역해 주는 방향으로 대민정책을 펼 것을 충고하고 있다. 그가 파악한 바로는, 留守府 승격 이후 부의 외촌민 일부는 비교적 裕民層임에도 불구하고 증액된 각종의 名色을 모면하고자 자신들의 향촌에서 유리된 것이며, 이는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부득이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무리들에 대해서는 이제 본래 각읍과 이주 전의 해당 관아에서 前歷을 묻지 말고 면역케 하여 부내에 安接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하였다. 우하영에 의하면, 우선 이들 무리들은 “형편에 따라 유도하여 성내를 채우는 일이 마땅하다”는 것이며, 성내의 閑曠處만 해도 약 1천 호를 채울 수 있는 까닭에 또다른 모민책을 쓰지 않아도 될 묘책이 된다는 것이다.53)
한편 우하영은 이러한 모민책과 함께 화성유수는 壯勇外使를 겸직하고 장용외영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으나, 그 중요성에 비추어 軍卒․吏卒들의 보급원이 매우 빈약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京營의 예에 따라 料布와 衣資를 지급해 주는 등 그 우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모민책으로서의 실효는 물론 유수영다운 위용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2) 산업진흥의 배경一市廛과 場市의 설치
정조의 對화성 읍민대책이 점차 실효를 거둔 결과, 당시 구읍치가 위치해 있던 龍伏面의 민호가 244호(인구 677명)였던데 비하여, 정조 14년 7월 신읍치에 이주해온 민호는 팔달산 기슭의 원주민호 63호를 포함하여 도합 719호에 이를 만큼 1년만에 증가된 민호는 3배에 달하였다.54)
또 우하영이 천일록 을 집필하던, 화성이 완공된 정조 20년(1796) 전후의 시기에 화성부는 성내 1천 호, 성외 1만 5천여 호의 민호를55) 거느릴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 상업도시․행정도시로서의 위용을 갖출 수 있었다.
신도시 수원을 상업도시로 육성․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상품유통거점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먼저 상인을 모취하여 廛房과 場市를 개설하고, 정부 차원의 상업활성화를 위한 진흥정책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읍 초기인 정조 14년 2월 좌의정 蔡濟恭에 의하여 상인 모취책으로 市廛과 장시 설치안이 제안되었는데,56) 이것은 바로 서울의 상업자본가 유치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이들 富戶․富商들에게 자본을 무이자로 대부하여 기와집 전방을 개설하려고 한 것은 바로 시장의 상설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畿輔의 大都會로서 신도시 화성의 도시적 면모와 번영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수원과 인근지방에 1월 6장의 5일장을 개설한다면, 수원부 중심의 장시의 상설화를 실현, 주민과 상인들이 스스로 모여들어 읍치의 상업적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 해 5월에는 수원부사 趙心泰에 의하여 수원 민인을 중심으로 상공업진흥을 위한 읍치 부양책이 제안되었다. 그의 의견은, 전국에서 부호를 모집하여 전방을 설치하자는 제안은 현재의 수원부 물산 형편으로는 어렵다고 보고, 우선 府民 중 자본이 있고 장사 물정을 아는 자를 선정, 그들에게 衙門에서 6만냥의 자금을 구획받아 3년을 기한으로 상업자금으로 무이자 융자해 준다면, 募民과 지역사회의 산업진흥을 위해서도 유효한 방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상인들에게는 廛名을 주지 않고 상업의 종류도 각자의 자유에 맡기자고 하였다. 이어서 조심태는 造泡寺인 龍珠寺 승려들의 생활이 빈곤하므로 이들에게 자금을 분급하여 종이와 신발을 만들게 하자는 즉 두부․종이․신발 등 수공업 진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출된 바 있었다.57)
아무튼 조심태의 수원민인 중심의 제안에 대해서는 채제공과 우의정 金鍾秀가 적극 동조함으로써 마침내 균역청 관하 賑恤廳의 돈 6만 5천냥을 대부받아 신도시 초기의 시전이 설립되고, 성내외에 남․북의 2곳 장시도 개설되어 상업활동의 거점으로 도시적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정조 14년 중반기부터 수원부 성내 官門 밖에 설치된 시전 各廛은 다음과 같다.58)
① 立色廛 …… 官門外路 북쪽에 위치. 각종의 비단을 진열.
② 魚物廛 …… 입색전과 通房되는 곳에 위치. 생선․과일 등을 진열.
③ 木布廛 …… 관문외로 남쪽에 위치. 白木․苧布․木花 등을 진열
④ 鹽及床廛 …… 소금․상 등을 진열
⑤ 米穀廛 …… 관문 밖 동쪽에 위치. 白米․南草․麵子 등을 진열.
⑥ 鍮鐵廛 …… 북리 店 중에 위치.
⑦ 棺槨廛 …… 미곡전과 통방되는 곳에 위치.
⑧ 紙鞋廛 …… 관곽전 아래에 위치. 정조 15년에 새로 건립됨.
이들 8개의 시전 상인들은 앞의 실록기사로 미루어 부사 조심태가 당초에 구상했던 대로, 장사 수완이 있고 상업자본이 가능한 여유있는 수원의 민인들 중에서 우선 선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각전들은 이읍초기의 사정과 내용을 기술한 수원부읍지 에 의하면, 정조 14년 중반기 이후에 ①~⑦의 전방이 설치되고, ⑧의 지혜전은 그 이듬해에 개설되었음이 틀림없다. 특히 이들 시전 가운데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진 것은 소금과 쌀을 취급하는 각전이었다. 이것은 이 고장이 서쪽으로 남양만을 끼고 있고, 동․남쪽으로 곡창지대가 위치해 있는 지역적 여건으로 인하여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시기 관의 절대적 지원을 받고 있던 이들 각전 상인들에게는 都賈행위를 허용했던 듯, 초기에는 미곡전 상인들의 米穀都賈로 인하여 이주해온 小民들의 失利가 자못 심하여 한때 이주민이 감소되는 등 부작용이 뒤따랐다.59) 그러나 수원은 화성성역
이 끝나던 정조 20년 국왕의 特敎로 장안문 밖에 良才驛을 옮겨 대규모의 迎華道와 驛站이 설치되고,60) 서울과 수원간의 園幸을 위한 신작로가 닦여지고, 정부의 對화성 상업육성정책 등이 주효하여 점차 서울 주변의 상품유통 중심지로 발전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3) 小商人중심의 상업진흥과 場市育成論
정조 14년 중반부터 시전이 설치되고, 정조 20년 화성 축성을 전후한 시기까지 城內外에 남․북장시가 개설되어 신도시 화성이 상업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춘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농업이론가로서 신도시의 건설과정을 지켜봤던 우하영은 坐販行商 등 상업활동으로 生利를 얻는 小商人의 보호와 상업의 육성을 통하여 도시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상업진흥론에 있어서도 보다 구체적이고 전진적인 관점을 피력하였다. 신도시 화성의 경우, 우하영은 民業을 발전시키고 募民策과 상업활성화의 방책으로 먼저 鹽商과 米商이 지역사정에 유리함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요목을 구체화하였다.
첫째, 부내 남․북장시 가운데 鹽利가 가장 큼을 들어 염상의 진흥․육성책을 이렇게 예시하였다.
지금 府下의 남․북장시를 보면 鹽利가 가장 크다. 남시장에서는 평시에도 每場에 매매되는 양이 항상 100여 바리(駄)가 되며, 만약 3․4월 장 담그는 때나, 8․9월 김장할 때면 하루 팔리는 것 이 거의 수백여 바리에 이른다. 지금 부내 민인으로서 염상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스스로 辦하고, 말을 장만하여 행상할 수 있는 자는 그 自辦에 맡기고, 진실로 자판할 수 없는 자는 각기 25兩을 주어, 본전으로 삼아 말을 장만하고 소금을 구해서 행상하도록 한다.61)
여기에서 우하영이 말하는 南市場(현 榮洞市場)은 남문 밖에 개설되어 城外시장이라 불렸으며, 北市場은 북문 안 북수동에 설치되어 城內시장이라 불리면서 각각 4일․9일과 2일․7일에 開市되던 5일장을 가리킨다. 이중 성밖 남시장에서 거래되는 소금만 하더라도 비수기에는 매장마다 약 200가마, 3․4월 장 담글 때나 8․9월 김장철 같은 성수기에는 거의 1천여 가마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소금이 남시장에서 많이 거래되고 있는 것은, 화성부는 서남쪽으로 어염이 풍부한 남양만을 끼고 있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품질좋은 天日鹽이 수원장시에 집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장시나 민인들에게 유통․소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62)
특히 우하영이 권장․육성하려고 하는 염상은 좌판․행상 등의 소상업자를 말하며, 이것은 소농․소상인층을 보호하고 資活시키려는 그의 일관된 민본주의적 시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소상업로서의 염상은 자본 능력 여부에 따라서 官에서 자금을 융통해 주되, 본전의 收俸은 장사에 일정한 경험과 요령을 얻는 기간인 3개월 후 매월 1냥씩 30개월에 걸쳐 분납케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할 때 관에서는 1분의 利를 거두게 되고, 염상 역시 資生할 수 있어 상호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価販者가 많아지고, 그들이 장시에 전방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까지 외촌과 他關의 행상은 금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렇게 할 때 염상으로 나서는 읍민 100여 호의 生利는 보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배려를 하는 이유는, 府下민인은 지역사정에 밝아 외촌이나 타관의 행상들보다 편리하기 때문이며, 또 장사의 妙는 薄利多賣를 실천할 때 성공을 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63)
둘째, 부내의 상업을 활성화시키고 민인이 自利를 얻을 수 있는 방책으로 米商을 장려․육성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당시 수원지방 농민들의 主所得源은 오로지 곡식에만 의존하고, 그중에서 쌀이 主宗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현재 米商에 종사하며 再生하려는 무리가 많음을 고려, 부민중에서 미상을 희망하는 자를 모취하여 앞의 염상의 예에 따라, 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자에게 25냥을 대부해 주어 생업을 삼게 하고, 또 본전의 수납도 역시 3개월 뒤 매월 분납케 하였다.64)
셋째, 官錢을 빌려주는 일은 상업행위로서 부민의 生利를 보장하고, 부내 장시를 육성시키려는데 있는 만큼 대부에 따른 갖가지 부작용의 예방도 강구하고자 하였다. 관전을 활용하여 민인의 자활과 상업진흥을 꾀하는 일은 장려할 만한 일이나, 특히 각처에서 유입된 新入戶의 경우 失利하면 관전을 갚지 않고 도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우려의 소리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견에 따르면, “비록 新入流戶라 할지라도 능히 집을 지어 인접한 연후에 모취에 응하여 상업을 하기 때문에 25냥의 대부금 때문에 도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또 “府下에 5家作統制를 嚴立하여 그중 뿌리가 깊은 實戶로써 統首를 삼고, 전출입하는 자를 統首와 里任으로 하여금 보고케” 한다면 도망자는 고발되고, 만일 官債를 갚지 않고 도망하는 경우는 禁盜所에서 즉시 체포할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65)
우하영의 상업관은 앞의 상업적 농업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그 장려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 농촌에서 이탈된 소민층의 생계를 보장해 주고, 지역경제의 번영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염상․미상 등 소상인의 상행위도 그것이 일정한 궤도에 오를 때까지 동종의 타지역 상인의 활동을 금하게 한데서도, 그 지역적 특성과 향토애가 잘 드러나 있다.
4) 浦口상업의 진흥책-濱汀浦의 例
18세기 말 계획된 신도시로서 화성이 건설되고 상업도시로서 발전하기 이전, 경기지역만 하더라도 서울․개성은 말할 것도 없고, 안성 읍내장․광주 松坡場과 沙平場․양주 樓院 등은 수원에 앞서 상업과 시장기능이 훨씬 활성화된 곳들이었다. 이미 그 지역에는 상설적인 廛房이나 5일장과 같은 정기적인 장시체제가 틀이 잡혀, 농산물․수공업품․수산물 등 매우 다양화된 상품들이 큰 규모로 활발하게 교역되었다. 또한 이 시기 한강연안에는 전국을 상대로 하는 京江商人의 都賈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水上․陸上運輸 등 교통의 요지와 물화의 집산지에는 장시가 형성된 바 있었다.66)
한편 수원이 이읍 후 중부지역에 있어서 상품유통의 중심적인 상업도시로 성장하게 된 요인 중에는, 삼남의 요로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 외에도 정조의 정기적인 園幸을 위하여 신설․보수된 노량진과 수원간의 도로 개통, 迎華驛과 같은 대규모 역참의 개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조를 비롯한 정부의 적극적인 對화성 산업진흥정책이 크게 주효하였다. 그러한 조건 외에도 수원은 해안지역을 개발 활용할 경우, 보다 규모가 크고 편리한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서 발전․번영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즉, 신도시 화성은 전국 시장권의 중심지인 서울 남쪽의 副都로서 도시적 기능을 가진데다가, 서쪽으로는 품질좋은 魚鹽과 海藻類의 산지이자 해상교통로인 남양만을 끼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로 화성성역 당시 전국 각지에서 조달된 城材의 물자유통이 그곳 鷗浦 등을 통해 운송, 성역을 원활하게 끝낼 수 있었다. 즉, 성역 당시 목재․철물 등의 물자는 兵․防船, 私船 및 地主船 등 船運에 의하여 운송됨으로써 治木所로서의 기능과 함께 성재의 주요 집결지의 구실을 하였다.67)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해볼 때, 우하영이 자신의 향촌 부근에 위치한 남양만의 浦口 濱汀浦의 재개발과 번영책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것은, 포구상업에 대한 또다른 인식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을 요한다. 그는 먼저 상업․수산업의 교역과 해상교통운수 발달의 요지가 되는 곳이 배가 정박하는 포구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곳은 옛부터 水陸(항구)의 도회지가 되게 마련이라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신읍치 화성부로부터 30리 떨어진 지점인 남양만의 鷗浦 濱汀村 문제를 본격적으로 예거하였다.
(빈정포는) 이전에 富戶가 많이 살던 때는 錢貨가 넉넉한 까닭에 어선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각처 商賈에 판매되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점차 敗村이 되면서 부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 능히 船主人이 될 만한 업자가 없다. 때문에 해산물을 실은 상선들이 거의 옮겨가 陽城 瓮浦와 廣州 松湖(坡)에 정박하게 되니, 이는 사실상 구포에서는 부호로서 능히 선주인이 될 만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만일 府中 元居人 중에서 勤幹하고 사리를 아는 몇 사람을 택하여 선주인으로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구포 빈정촌에 나와 살게 하며, 넉넉히 관전을 대주어 물주로 삼고 그 선박이 와서 정박하는 대로 給價케 하고 船人을 상륙시켜 그들로 하여금 지체함이 없도록 해준다. 그리고 物種은 府中의 魚廛으로 운반하여 원근의 商賈들로 하여금 모두 판매케 한다면, 사방에서 소문을 들은 무리들이 반드시 雲集케 되어 포구의 큰 도회지를 이룰 것이다.68)
그에 의하면, 구포의 빈정촌은 옛부터 남양만의 유수한 포구의 하나로서, 수원을 중심으로 중부지방 일대에 어염을 비롯한 수산물 공급지의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특히 전성기에는 상선의 출입도 잦고, 자본을 갖춘 유력한 船主人들에 의하여 각처 魚商들과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하나의 도회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관수만록 이 집필되던 정조 20년(1796)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양성 옹포와 광주 송호(파)가 새로운 포구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元居 부호인 선주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점차 敗村窮巷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내 어전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포구 빈정포의 재개발과 새로운 번영은, 신도시 화성의 상업진흥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官府에서 어선과 뱃사람들을 정박시키는데 편리와 도움을 주는 제반 시설물과 자본을 갖춘 유력한 선주인의 상업자본을 유치하여 이를 육성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주요한 문제가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러한 요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해상운수의 역할을 담당하는 포구로서 빈정포의 기능을 먼저 회복시켜 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대체로 충청도 沔川 이북에서 경기도 인천 이남 수백여 리 사이에 상선이 정박하는 곳은 오직 옹포․빈정포․송호 세 곳뿐이다. 그러나 그 지세로 말한다면 옹포는 궁벽하여 한쪽 모퉁이에 있고, 오직 빈정포와 송호의 해문은 직접 통하니, 대상인들이 장사할 만한 곳이다. 또 경기좌도 각읍은 어염의 길이 모두 수원부중에 나아가니, 이제 만일 관전을 給債해 주어 선주인으로 하여금 빈정촌에 나가 머무르게 하고, 府校 몇 사람을 옹포와 송호에 파견하여 상선의 출입을 금하게 한다면, 그 형세가 자연 빈정포에 모여들 것이다.69)
즉, 그에 의하면 충청도 이북에서 경기도 인천 이남에 있어서 주요 포구는 옹포․빈정포․송호 세 곳인데, 그중 남양만의 빈정포는 어선․상선이 정박하기에 편리하고 상업자본가(선주인)들이 상업활동을 영위하는데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정적 조치를 취해서라도 빈정포에 상선 정박을 유도하는 정책을 편다면, 빈정포의 再価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더욱이 이곳은 시전과 장시가 개설된 府中과는 30리 거리에 위치해 있는 데다가, 당시 수원부는 경기․서울․충청도 등 중부권에 어염의 유통중심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빈정포를 再価시키는 것이 신도시 화성의 상업번영의 한 방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이곳의 포구상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어염을 타지역보다 염가로 판매․공급한다면, 각 지역의 상인들이 즐겨 모여들어 그 인식을 달리하는 계기가 된다고 하였다. 아무튼 우하영이 신도시 화성의 상업진흥책과 관련하여 수원을 비롯한 중부 내륙지방에 소금․생선․해조류 등을 유통․공급할 수 있는 중심지로서 빈정포라는 포구상업에 주목한 것은 매우 특기할 점이라고 하겠다.
5. 맺 음 말
조선후기 사회는 중세사회의 해체가 진행되는 가운데 근대를 향한 일대 변화와 전환기적 動因이 각 부문에서 태동하던 시대였다. 이 새로운 변화와 모색의 양상이 상징적으로 집약된 歷史像의 하나가 바로 계몽군주 정조의 주도하에 이룩된 신도시 화성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말 화성 신도시 건설은 개혁정치와 왕권강화, 문운의 융성을 아울러 추구하던 정조의 정치력과 문화의식을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지만,70) 이 시대를 살았던 향촌지식인의 對華城觀이나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時務論은 당시 향촌민의 입장이나 향촌사회 각 부문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데 매우 유용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글이 천일록 을 저술한 수원 출신의 醉石室 禹夏永의 방대한 저술 중 주로 화성 관련 부분을 논의에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며, 18세기 말 近畿實學의 학풍과 향촌사회관을 이해하는데도 일정한 의미가 있을 줄로 안다.
첫째, 18세기 말 대표적인 농업이론가의 한 사람이었던 우하영은, 農家總覽 , 田制 附農政․ 수원유생우하영경륜 등을 통하여 위기에 직면한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고 國富의 충실화를 기하려면 먼저 농업생산력의 증진이 필요하다고 보고, 務本意識의 고취와 강력한 권농정책을 역설한 바 있었다. 그는 이러한 권농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勸農官制의 활성화와 農官운영절목의 제정․시행을 요청하였다.71) 특히 그는 당시 향촌사회에서 일반화된 비생산적인 懶農과 遊手의 풍조를 국가적 차원에서 강력히 懲治하는 농촌통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해이된 향촌사회의 결속과 재흥을 위한 대안의 하나로 풍속교화와 상부상조의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농촌의 자치조직으로서 鄕約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조선후기 수원지방의 향약으로 거의 유일한 우하영의 「鄕約說」은 근기지역 향촌사회의 실상과 농업진흥 문제와 결부되어 그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고 하겠다.
둘째,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을 포괄하는 천일록 의 농업론은 경기지역, 그중에서도 수원을 중심으로 한 그 지역적 사정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17세기 말 이래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의 경우, 이앙법의 수전농 적용이 일반화되면서 豪富層의 토지겸병과 廣作의 확대로 인해 소농민의 분해현상을 향촌사회의 일대 위기로 파악, 특히 懶農廣作 현상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소농층의 토지이탈과 토지생산성을 저하시키는 나농풍조는 바로 대다수 소농민을 위협하고, 향촌사회는 물론 국가적으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관점에서 精農思想에 입각한 집약적 소농경영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과 신도시 화성이 상업도시로 발전하던 시점에서 상업적 농업의 필요성을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즉, 그가 천일록 도처에서 主穀 중심에서 미나리․무 등 도시근교의 채소농업을 권장한 것이라든지, 담배를 제외한 목면․인삼․생강․닥나무․대나무․옻나무 등 특용작물의 유용성과 상품화를 주장한 것이 그 예이다. 이것도 발전하는 시대현실에 대한 전진적인 관점과 함께, 소농의 입장에서 농민경제의 안정을 목표로 삼았던 그의 농업론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 그는 신도시 화성의 번영과 상업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상공업진흥 부분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인 관점을 드러냈다. 특히 그가 화성의 상공업진흥과 소상인층의 자활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강조한 薄利多賣의 보편적인 상행위 인식은 근대적인 시장원리에 접근한 것으로서, 重農的인 근기학파 실학의 충실한 계승자인 우하영의 상업관이 농업과 대립되는 측면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지역․가문․당색면에서 安山에서 학문을 영위하던 星湖의 학풍과 가장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업이나 수공업의 지나친 발전을 억제하고 금속화폐의 유통에 부정적이었던 선배학자 성호와는 달리 우하영은 상공업에 대한 보다 전진적인 관점을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즉, 그의 상업관은 소민층의 資生을 보장하고 사회적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補足的이면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는 보다 열려있고, 선진적인 현실인식의 징표임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것은 자신의 향촌사회가 지니고 있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 변화를 거듭하고 있던 18세기 말 신도시 화성의 도시적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는 상업진흥과 장시육성이 필수요건임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업관은 우하영이 관수만록 을 통하여 화성부의 남․북장시와 주변 5일장시에서 거래되는 어염과 미곡, 그리고 미나리를 비롯한 각종 소채 등의 특용작물이 한층 지방적․도시근교적 특성을 갖춘 상업적 작물임을 내세운 견해와도 일정하게 照應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화성 향촌사회의 발전을 위한 개혁적인 입론은 觀水漫錄 중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이 저작은 정조대의 화성지방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향촌민의 입장에서 향촌사회의 농업․상공업 등을 비롯하여 田制․환곡․軍制․城制․풍속․행정구역 개편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점에 대한 處方策으로서의 개혁론이 개진되어 있다. 특히 소농민․소상인․軍校․吏胥 등 소민층의 입장에서 향촌사회의 문제점과 개혁책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본론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입론들은, 예컨대 화성축조 방략에 있어서도 성읍으로서의 기능을 지닌 內城과 그 취약점을 보완하고, 방어와 공격성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外城의 필요성을 주장한 土築의 內․外城 築城方略論이 그것이다.72) 그밖에도 그는 화성성역 후 禿城의 撤移와 목장의 罷置를 통하여 군교․이서층의 料資를 마련하자는 제안, 민폐와 불편을 주던 화성의 夜禁制度에 대한 개선책, 田賦․환곡․신․호역 등 3정문제와 관련한 행정구역의 개편 문제, 둔전의 설치 운영에 대한 개선책, 화성부로 藥丸移貢을 해야 한다는 논의, 補軍庫와 補民庫의 운영에 대한 개선책 등 18세기 말 신도시 수원사회가 당면했던 제문제에 대한 실로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시무론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성 성곽과 壯勇外營의 설치 등 군사도시로서 비중이 컸던 이 고장의 수공업 진흥을 위해서 화약과 鉛丸의 貢物을 화성부로 옮겨야 한다는 제안은 매우 인상적이다.73) 이읍 초기부터 수원의 수공업 발전을 위하여 4천 냥의 금융지원을 통하여 製紙의 선진지방인 安城의 紙匠을 유치,74) 종이 생산을 활성화하려 했고, 실제로 정조대 중엽 이후 이 고장은 종이 생산을 담당하던 造紙所가 龍珠寺․紙串里․紙所洞에 설치되어, 닥나무의 재배도 본격화되었다.75) 수원의 이러한 제지 수공업은 수원부의 시전인 紙鞋廛이 설치되기 전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 같다. 우하영이 建都 附山川風土關扼 등에서 특용작물인 닥나무의 재배를 거론하고 있는 것도 당시의 이러한 수원지방의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醉石室 禹夏永의 향촌사회발전론*1)
―正祖代 향촌지식인의 對華城觀
崔 洪 奎**2)
1. 머리말
2. 향촌사회의 농업진흥과 鄕約 인식
1) 후기사회의 변동과 鄕弊
2) 향촌사회와 「鄕約說」
3. 신도시 華城의 농업진흥론
1) 小農經營論과 懶農廣作 비판
2) 상업적 농업론
4. 신도시 繁榮策과 상업진흥론
1) 華城의 募民策
2) 산업진흥의 배경―市廛과 場市의 설치
3) 小商人중심의 상업진흥과 場市育成論
4) 浦口상업의 진흥책―濱汀浦의 例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후기 수원 출신의 실학자 禹夏永(1741~1812, 자 大猷, 호 醉石室․醒石堂)의 저작과 사상의 개략적인 모습이 1970년대 초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처음 소개된 이후, 이에 대한 관심의 폭이 보다 확대되고 연구의 깊이가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의 일이다.1) 물론 우하
영의 저작 중 일부는 1919년 3월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도서해제 를 통하여 그 존재가 확인된 바 있고, 국내에는 서울대 규장각 <想白文庫> 속에 年紀未詳의 千一錄 10책2)과 별책의 觀水漫錄 下, 水原儒生禹夏永經綸 등 3종이 유전해 왔으나 학술적인 측면에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북한의 경우 1964년 천일록 이 민족고전의 하나로 抄譯本이나마 국역되고, 1983년에 완간된 조선전사 중세편에서는 천일록 의 농업기술론을 비롯한 농업문제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우하영의 사상과 저작의 사료적 가치에 크게 주목하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초 북한사회에서 일기 시작한 농촌경제의 자력갱생 내지 노동생산력 제고를 위한 千里馬작업반운동 등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갖고 이루어진 점도 우선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 뒤 1970년대 후반 일본의 연구자 宮嶋博史에 의하여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농서로서 천일록 이 주목된 이후 1980년대 중반 김용섭에 의하여 이 농서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남․북한과 일본학계에서는 주로 천일록 의 농업론에 대하여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농업문제 인식 또한 단편적이고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천일록 을 비롯한 별책 관수만록 하․ 수원유생우하영경륜 등 우하영의 전 저작에 대한 전반적이고 구조적인 검토는 80년대 말 필자의 연구에 의하여 비로소 본격화된 바 있었다. 특히 당시까지 학계에서 우하영이라는 近畿地域의 학자가 수원유생일 것으로만 막연히 알려져온 현실에서 그의 家系․향촌․묘소 등이 필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혀짐으로써3) 그 출신․黨色․學脈 등을 고려한 그의 學風․사상의 全体相을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조 20년(1796) 4월 국왕의 求言綸音에 대한 應旨呈疏 때 별책으로 제출된 수원유생우하영경륜 의 저자는 영조 17년(1741) 2월 1일 경기도 수원부 好梅折 於良川面 外村(현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의 몰락한 남인계 가문에서 태어나 불우한 삶을 영위해온 재야학자였음이 밝혀졌다. 그는 조선중기 李滉의 門下에서 柳成龍과 同門修學한 성리학자이자 南人의 領袖로 활약한 秋淵 禹性傳(1542~1593)의 직계 7대손으로 천일록 ․ 관수만록 등을 저술하고, 7대조인 秋淵의 유고 癸甲日錄 의 간행 주역을 맡아 남인계의 선배학자인 晩年의 李瀷과 당시 華城留守였던 蔡濟恭에게 각각 後序․墓碣銘과 諡狀의 집필을 부탁했던 장본인이었음도 확인되었다.4) 추연은 일찍이 수원현감을 역임한 뒤 선조 24년(1591) 북인의 책동으
로 관직을 削奪당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고지인 수원지방에서 起義, 의병장으로 金千鎰과 함께 수원․강화 등지에서 戰功을 세워 大司成에 特進된 바 있었다.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서의 활약상은 일제 초기 그의 신도비가 수난을 당하는 단서가 되었으며, 그 후 매송면 숙곡리 묘소 입구에 재건립된 ‘추연선생신도비’에도 星湖의 碑銘에 덧붙여 선조의 업적을 현창하는데 힘쓴 우하영의 역할이 간략히 기재되어 전해온다.
우하영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수원 서쪽 南陽灣의 주요포구의 하나인 濱汀浦 부근 七寶山 아래에 위치한 현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 향촌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생애를 보내는 가운데 필생의 작업으로 천일록 을 집필하는데 시종하였다. 그의 對사회적 활동은 18세기 말 正祖의 수원 신도시건설과 화성 축조에서 큰 자극을 받아 정조 20년(1796)의 「丙辰四月應旨疏」와 순조 4년(1804)의 「甲子二月應旨疏」 등 두 차례의 국왕의 求言綸音에 대한 應旨疏를 통하여 그의 존재와 경륜이 처음으로 朝野에 드러났다. 富國裕民․民生補資의 이상이 담긴 그의 時務論의 편린이 정조․순조실록과 日省錄 ․ 備邊司謄錄 등 연대기자료에 등재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의 학문적․사상적 본령은 농업을 비롯한 상공업․광업․어업 등 산업 문제에 있었으며, 풍속․지리․군사․교통운수제도 및 운영상의 문제에서 향촌사회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대가 당면한 제문제에 대한 개혁책을 역사주의적 관점과 실증적 연구방법으로 제안한 전작체계 천일록 속에 담겨져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백과전서적인 저술 속에는 16세기 이래 李珥․趙憲․許曄․柳成龍․李晬光․柳馨遠 등의 시무론적 경세사상과 李瀷에서 開花된 近畿南人의 중농 학풍을 수용, 이를 실천적 측면에서 적용하려는 보다 현실주의적 관점이 주류를 이룬다.5)
우하영의 저작 가운데 크게 돋보이는 부분은 첫째, 小農의 입장에서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 등 개혁적인 농업론을 모색하려한 점, 둘째 과거제․군제 및 군정․신분제․전제 및 전정․환정 등 정치․사회제도상의 개혁론을 개진하려 했고, 셋째 정조대 현안의 역사적 과제로 추진된 신도시 건설과 성곽 축조 등으로 空前의 변화에 직면했던 자신의 향촌인 화성지방의 발전을 위한 지역개발론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성을 중심으로 한 그의 향촌사회발전론은 정조 중엽에서 말엽에 걸쳐 추진된 국왕 주도하의 華城경영 문제와 결부되어 18세기 말 화성 향촌민의 입장과 향촌사회의 변화와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크게 주목되는 부분이다. 18세기 말의 신도시 화성경영은 정조가 집권 중반 이후 말엽에 이르는 11년간의 걸쳐 그의 정치적 이상이 담긴 역사적인 사업으로 주력했던 만큼, 국왕의 對화성정책에 대한 향촌지식인의 반응과 지방사적 측면에서 사회경제적 실효 여부를 가늠하는데도 하나의 지표를 제공해 주리라고 전망된다.
2. 향촌사회의 농업진흥과 鄕約인식
1) 후기사회의 변동과 鄕弊
조선후기 사회, 특히 우하영이 살던 18세기 말은 기존의 체제․산업․사상․습속 등이 여러 부문에서 이완․해체되고, 새로운 질서․사상의 모색을 통하여 근대사회의 전환기적 動因도 아울러 움트던 시대였다. 특히 사회신분제의 변동은 봉건적인 위계질서에 의해 운영되던 향촌사회를 크게 변모시키기에 이르렀다.6) 이러한 사회동요에서 파생된 일부 양반층의 몰락과 평․
천민의 신분상승 등 계층간의 갈등과 利害가 대립되어 농촌공동체의 분위기는 물론 농업생산력의 유지․향상을 위해서도 시급히 대응해야 할 농정상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천일록 의 저자가 자주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시대 근기지역 농촌에서는 사회기강이 해이되어 懶農과 遊手者가 속출하고 있었고, 鄕弊 또한 다양하였다.
우하영이 관찰한 농촌은, 자신의 향촌인 수원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도처에 걸쳐 대부분 離農과 頹俗, 懶農 풍조가 만연된 敗村窮巷 바로 그것이었다.7) 농업 문제에 국한해 볼 때도, 당시 근기농촌에서 일반화되고 있던 小農들의 농촌 遊離와 비생산적인 懶農 풍조 외에도 날로 심화되고있던 反사회적․反농촌적인 각종의 鄕弊였다. 그는 후기사회 각 부분의 폐단을 廉防․譜弊․鄕弊․幕弊․營吏弊․京鄕營邑 軍校弊․蔘弊․軍木弊․學校弊․山地廣占弊 등 11조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위기의식을 환기시킴과 아울러 그 處防箋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 예의 하나로, 우하영은 당시 향촌사회의 질서와 풍습이 문란되고 偸薄하게 된 주요 이유가 국가에서 권장한 空名帖 실시에 있다고 보고, 그 폐단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친족과 이웃이 죽어가는데도 일찍이 升斗의 곡식을 서로 돕지 않고 오직 官에 곡식을 가져주고, 공명첩 얻을 계책만 하니 민속이 투박하게 된 것은 오직 공명첩에서 말미암은 것이다.8)
納粟空名帖은 본래 壬亂 후 식량조달책으로 마련된 것이었으나 이후 흉년이 들 때마다 納粟授職은 더욱 확대되어 常民에게도 남발될 정도였으며,9) 또 각종 기록에도 해당 吏屬들과 결탁
하여 ‘납속’이라 쓰지 않고 단지 ‘通正’만 쓴 결과 당시 신․호역에 응하는 무리는 10여 호에 불과한 형편이었다.10) 이러한 공명첩은 우하영이 천일록 집필에 착수하던 正祖代에도 그 수가 더욱 늘어나, 재위 24년 동안 무려 23,310개가 발급될 정도였다. 그리고 우하영에 의하면, 그 값은 단지 10여금에 지나지 않아 그 이상을 꾸릴 수 있는 형편의 민인들은 金玉을 내고서 가만히 앉아서 軍保에서 면제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군보․賤隸의 면역 특혜는 향촌사회 내에 폐습을 더욱 조장시켜 급기야 몰락한 班族을 凌踏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명분 또한 크게 추락하여 殘班․상민층 간의 갈등과 사회기강이 문란해지는 등 사회문제를 크게 야기시키는 것으로 인식하다.11)
공명첩의 폐단에 대한 인식과 함께 우하영은 당시 향촌사회 내에서 財富의 경제력에 따라 신분분화와 鄕職이 점유되는 등 賣鄕과 儒鄕分岐, 향촌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新․舊鄕 간의 鄕戰이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깊이 우려하였다. 그에 의하면, 후기 향촌사회의 질서와 鄕網을 무너뜨리게 하는 또다른 현상은 留鄕所 운영에 있어서 賣鄕과 差任을 도모하는데 따른 鄕任과 官屬의 不法作弊였다. 당시 향촌사회에서 鄕任差帖을 얻기 위하여 소를 팔아서라도 지방정부에 납속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듯하다. 가난하고 우매한 백성이 아니면 모두 향임을 칭하고 앉아서 군역을 면하려고 한 까닭에,12) 軍保는 모두 虛錄되어 軍額은 갈수록 부족해질 뿐만 아니라 요역은 힘없는 소농민에게 더욱 편중되는 등 民弊가 극심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13) 이러한 현상들은 대부분의 지방에서 사족양반으로 대표되는 舊鄕이 서원과 향약 등을 바탕으로 鄕論을 주도한데 대하여, 서얼․평민 출신의 양반으로 대표된 新鄕은 유향소를 근거로 부세를 관장하고 수령을 보좌하면서 스스로의 권익과 지위를 상승․증대시키는 과정에서 이른바 鄕戰이란 이름으로14) 갈등을 빚던 현실과 일정하게 照應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문란한 향촌질서와 향폐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하영은,
국가에 기강이 있음은 사람에게 혈맥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사람에게 혈맥이 없으면 운동할 수 없고,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制治할 수 없다.15)
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향폐에 대한 방지와 해결책으로, 국법으로 조목을 嚴立하여 준수하도록 守宰에 의한 강력하고도 공평무사한 對民統制를 촉구하였다. 또한 무엇보다도 해이․문란된 후기사회의 붕괴적 현상과 이에 부수되어 懶農과 遊愘의 기풍이 만연된 농촌공동체를 결속시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킨다는 목표 아래 勸農政策과 민습을 교화하기 위한 勸農節目과16) 鄕
約을 구상․입안하기에 이르렀다.
2) 향촌사회와 「鄕約說」
조선후기사회가 변동을 겪게 된 것은, 사회신분제의 변화 외에도 상품화폐경제와 농업기술․농업경영의 발전 등 제요인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결과이지만, 이에 부수되어 향촌사회 내부에서는 농민분해로 인한 소․빈농층의 농촌 遊離가 가속화되고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우하영이 관찰한 대로 각종의 향폐가 표면화되자 이를 위기적 상황으로까지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후반 海州․平山 등지의 읍에서는 栗谷鄕約이 立定 시행된 바 있으며,17) 이것으로 인해 후기사회에 이르기까지 賣鄕․圖差의 폐단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 하면서, 향약을 통하여 향폐를 근절시킨 실례를 제시하였다. 우하영이 구상한 향약의 기능은, 향촌사회 내에서 頹風에 물든 비생산적인 습속을 순화하고 각종 향폐에 대한 정부와 지방관의 적극적인 대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농민의 보호와 농업생산력의 제고하는 차원에서 또 권농정책이 전제된 농촌공동체의 향촌자치조직으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향약을 구상, 입안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우하영이 수원향촌에서의 시행을 목표로 「鄕約說」이 입안되기 이전에도, 같은 근기지역인 廣州지방에서도 順菴 安鼎福에 의해서 二里洞約 이 제정 시행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영조 32년(1756) 순암의 나이 45세 때 자신의 향리인 慶安面 二里에서 시행하기 위해 立定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향약의 하나이다.18) 순암은 이 동약의 서문을 통하여 “가까
운 것과 적은 것으로부터 천하에 미친다”는 관점에서 풍속교화와 政令의 이행은 촌락사회의 단위를 중심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한 아무리 聖王이라 할지라도 백성을 교화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당대에 만연되고 있는 퇴풍과 악습이 근본적으로 집정자들이 “횡포를 자행한 결과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풍습이 투박해진다”고 보고, 민심을 순화시킨 연후에 敎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9) 그리하여 呂氏鄕約이 나타난 사회적 배경을 참고해볼 때 “퇴폐한 민심을 단결로 이끌기 위해서는 오늘날 향약을 시행함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다”20)고 민심수습과 향촌사회의 결속을 위한 풍속교화와 통제의 필요성을 밝혔다.
순암은 향약의 실현을 위하여 그 하부조직을 比․閭단계를 거쳐 ‘風約’을 실현하고, 그 상부조직으로 洞․面․鄕에 이르기까지 4단계로 구성할 것을 착상하였다.21) 순암은 일찍이 下學指南 에서 朱子增損呂氏鄕約 과 李滉․李珥․鄭逑․黃宗海( 木川鄕約 )의 향약을 예거하면서 지방적 특성이 담긴 향약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향리에 은퇴한 후 隣保的인 자치조직으로서의 기능과 실효성을 전제로, 5家統을 核으로 里․洞에 있어서 각각 風約과 洞約(洞契)을 양분하여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22) 그가 입정한 이리동약 은 광주 향촌에서 양반과 상․천민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상․중․하 合契의 조선후기의 특성이 담긴 향약의 하나이다. 이는 수원향촌에서의 시행을 전제로 한 우하영의 「향약설」보다 약 30여년 정도 앞서 제정, 시행된 것이었다.
근기학파의 실학자로서 순암보다 20년 後生인 우하영의 「향약설」은 1780~90년대의 피폐된 농촌사회의 鄕風振作과 化俗策으로 입안된 것으로, 이는 수원향촌에서의 시행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 편제는 忠孝相勉․德業相勸․禮俗相交․過失相規․患難相恤 등 5개 조목과 各洞節目․都憲節目 등 洞約에 관련된 2개 절목, 그리고 前代 名賢들의 향약 논의가 첨부된 附名碩議로 되어 있다. 「향약설」은 첫머리에서 正風俗․得賢才의 목표가 여씨향약에서 비롯되었음을 전제하고, 퇴계․율곡․반계의 향약을 계승한 것으로23) 밝혀 놓았다. 그러나 그 체제와 내용은 매우 면밀한 것이어서, 종래의 다른 향약과는 달리 충효상면조를 신설, 이를 서두에 넣어 새롭고도 독특한 향약으로 立條하였다. 충효의 권면을 제1조로 삼은 것은 유교적 윤리에 입각하여 君父師에 盡力함으로써 ‘世降俗偸’에 대한 ‘警世相勉’의 방책으로 삼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24) 또한 여씨향약 이래 기존 향약의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등 4개 조목을 변용, 충효상면을 제 1조로 넣고, ‘예속상규’를 과실상규보다 먼저 입조하고 있음은 향약의 제도가 대개 禮俗․敦風을 빛내려는 뜻에 있고, 또 예속이 이루어진다면 과실이 자연 적어질 것으로 예상한 때문이었다.25) 이러한 우하영의 의도는 당시 향약의 기본취지가 ‘守分之風’의 敎化振作․체제유지라는 차원에서 官 주도하의 鄕民을 규제하려는 태도를 지양, 순수한 향촌민의 입장에서 相扶相助를 강조하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制治之具’로서의 의미보다는 ‘導俗之具’의 차원에서 향약을 인식하려 했다는데 그 의의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우하영은 향약의 約任에 있어서도 邑=都憲 1인․副憲 2인, 洞=洞憲․執網․公員 각 1인을 두었으며, 각읍과 각동의 上下二元的인 구조로서 향약을 구상하였다. 먼저 각읍의 約任인 都․副憲은 鄕規의 예에 따라 校中齊會하여 뽑고, 각동에서는 동헌․집강․공원을 洞約의 예에 의거 향촌공동체를 구성하는 대․중․소, 전지역민의 참여하에 선출하는 등 上下一元的인 방식를 제시하였다. 또 상․중․하계의 구성원에게는 班常을 고려한 신분질서에 따라 합리적인 상벌조목을 제시하고 老病者와 여성 등에게도 그에 알맞는 罰課를 적용하는 등 매우 적절하리만큼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이처럼 우하영은 「향약설」을 통하여, 당시 사회신분제의 해이로 鄕弊와 邪風이 조장되고 분열되어가는 향촌사회의 붕괴적 양상에 대처, 향약을 향촌민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농촌공동체의 협동적 조직으로서 그 기능과 역할을 다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소농민의 입장에 서서 鄕民의 고통을 생각하고 대변하려는 그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연유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농민해체로 인한 소농층의 농촌이탈이 일반화되고, 懶農과 雜技․遊愘의 풍조가 만연되는 농촌현실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농촌지식인이었던 그에게는 매우 우려할 만한 비생산적․反농업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향약을 隣保와 相助의 美風을 진작시키는 향촌사회의 협동적인 자치조직으로 作動시키는 일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소농민의 입장에서 위기에 직면한 소농민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이었으며,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 國富를 도모하는데 기본바탕이 된다고 인식하였다.
우하영은 남양만 부근에 있는 수원향촌 一隅에서 몰락한 班族으로서 소농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며, 農家摠覽 ․ 田制 ․ 建都 附山川風土關扼 등을 저술할 만큼 농업이론에 정통하고 농민생활에 깊은 이해자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26) 그처럼 그가 향약의 입안은 통하여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協業과 勤儉力穡하는 농촌기풍을 진작시키려 했음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향약이 당시에 표면화되고 있던 각종의 향폐를 제거하는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민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일면 統制, 일면 협동이라는 향촌사회 내의 강력한 자치협약기구로서 소농민을 중심으로 한 상․중․하계의 향촌민에게 裨益이 되도록 배려하는 등 민본주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우하영의 향약은 30여년 전 광주향촌에서 시행된 순암의 「이리동약」이 상․중․하 합계의 후기 동약으로서의 특성을 지닌 점, 향촌사회의 인보적인 자치기구로서 관부가 수행해야 할 기능에 보조역할까지 갖춘 점27)등과 비교할 때 같은 근기남인계 실학자로서의 對民의식과 향촌사회관의 공통성을 엿볼 수 있다. 우하영 향약의 5개 조목과 「이리동약」에서 여씨향약의 4개 조목에 대한 附條를 덧붙여 후기 향촌사회의 현실성을 배려한 점, 특히 향약 속에 상부상조의 인보적 성격을 강화하면서 민본주의적 시각에서 신분적 제약을 크게 완화, 그 施惠를 균분해서 향유하려 한 점 등은 크게 돋보이는 부분이다.
3. 신도시 華城의 농업진흥론
1) 小農經營論과 懶農廣作 비판
18세기 말의 李重煥은 살 만한 땅의 입지조건으로서 6가지의 지리를 예거했거니와,28) 기후․
지형․토질의 沃瘠 등은 그 지역의 농업환경․농업관행․농업지대로서의 성격․양상을 특징짓는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적 특성과 농사관행은 農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조선전기의 農事直說 ․ 撮要新書 가 삼남의 농업기술체계를 반영한 농서라면, 姜岢孟의 衿陽雜錄 은 시흥을 중심으로 한수 이남 중부지방의 농법과 농사관행이 담긴 농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18세기 말 수원지방의 지역적 농업특성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천일록 의 농업론은, 경기지역의 소농경영과 농업기술체계․농사관행 등을 중심으로 엮어져, 전기의 금양잡록 과 일정한 전통적 계승․照應관계를 갖고 있음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29)
천일록 을 구성하는 「농가총람」․「전제」․「건도 부산천풍토 관액」과 별책 「관수만록」․「수원유생우하영경륜」등은, 조선후기 수원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역의 농업기술 수준과 농업경영․농사관행 등을 담은 전문성 있는 농서이거나 농업관련 저술들이다. 특히 「농가총람」은 전국 차원을 목표로 하되 수원지방의 농업특성을 전제로 우하영의 노동집약적인 小農經營論과 精農思想을 담은 농서이다. 이 농서는 山林經濟 를 포함하여 기존의 농서들이 농사직설 이나 농가집성 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18세기 이래의 새로운 농법과 재배기술을 수용, 저자의 체험적 농업론을 농업개혁의 차원에서 극복하려고 한 것이 특색이다.30) 그 내용면에서 「농가총람」은 耕種法․농지이용론․耕地法 ․施肥論 ․除草論 등 농업기술면에서 조선시대 농서의 교과서로 널리 인식되어온 농사직설 의 한계와 결함을 극복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농학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은 조선전기 이래 17세기 말까지 삼남에 비하여 토지의 비옥도와 농업기술면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며, 특히 수도작의 경우 그 토지조건과 재배기술은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31) 따라서 수원지방의 농업생산방식과 농업관행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던 우하영은, 천일록 의 집필을 통하여 보다 실천적이고 선진적인 농업기술․농업경영․농업정책론을 모색하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전국에 걸친 山川遊歷과 현지답사를 통하여 각 지역의 농업실태와 관행을 조사, 자연․인문환경과 선진농업기술을 비롯한 상업적 농업 등 각 지역의 농업지대적 특성과 장점을 소개하였다. 그의 농업지리서라고 할 수 있는 「건도 부산천풍토관액」은 畿甸(경기)을 중심으로 北關․西關․海西․關東․嶺南․湖南․耽羅 등 각 지역의 군현별 민속․농업․生利 등을 산업지리적 관점에서 생생하게 기술하였다.32)
우하영은 이 저술에서 전국의 지역별 농업환경과 관행을 관찰하고 토지의 비옥도와 농사절후의 早晩, 전답의 비율과 재배작물의 경종방식, 제초와 시비․수리문제, 주곡생산물 외의 농가부업 등을 조사하였다. 지역별 농업관행을 파악함에 있어서는 어느 경우에나 그 지역에 따른 토성의 肥瘠과 농민의 勤惰 여부를 대비시킴으로써,33)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이 기본요건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이 농서는 조선후기의 경기지역, 특히 수원지방의 낙후된 농업기술과 경영형태, 척박한 토성, 移秧廣作과 懶農風潮 등을 개선되어야 할 결점으로 지적․비판하였다.
13두락이지만 수원향촌에서 직접 소농경영을 영위하면서 노동력 투하를 통해 정경세작의 집약농법을 지향하고 있던 우하영이 경험하고 관찰한 수원지방의 농업현실은, 결코 발전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타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많은 문제점을 지닌 고장이었다.
(수원의) 농업은 모두 懶農이다. 밭에는 보리와 콩을 심는다. 오로지 벼농사에 힘쓰며 廣作한다. 직파를 적게 하고 注秧(이앙)이 많다. 토지는 척박하고 조세는 과중하며, 백성들은 원대한 계획이 없다. …… 밭은 一牛耕이며, 거름을 주지 않고 또 深耕하지 않기 때문에 수확이 아주 적다. 농촌에는 부유한 집이 드물다.34)
우하영에 의하면, 화성부는 토성이 척박하고 이앙광작이 성행하며, 전답에 거름도 잘 내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초에 있어서도 올벼(직파)는 2~3회, 秧田은 1회에 그치는 등 나농광작의 풍조가 성행하는 등 수도작의 농업기술이나 농업관행에 문제가 많았다. 밭은 一牛耕으로 秋麥播가 중심을 이루고, 콩 그루갈이 등 1년 2작이 보통이며, 다른 경기지역이 그렇듯이 稻麥 수전2모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다른 저술에서도 우하영이,
기전 가운데에서도 본부(화성)의 토성 또한 여주․이천․용인․안성 등 열읍보다 떨어지지만 田賦는 오히려 다른 읍보다 매우 무겁다.35)
고 지적했듯이, 조세 또한 토질에 비하여 너무 과중하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우하영이 관찰한 바로는 경기지역의 토성은 삼남은 물론 兩西 지방보다 아래였으며,36) 耕․
제초․糞田 등에 소홀하고(나농), 특히 문제는 수리와 토지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앙광작만을 농사로 삼는데 있었다. 따라서 17세기 말 이후 수원지방에서 성행한 이앙광작은37) 강수량이 적당하거나 시설이 가능한 경우에는 실효를 거두지만, 가물 때는 旱災를 입어 민인들이 遊離하는 단서가 된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18세기 말 당시 수원지방에는 萬石渠․萬年堤․祝滿堤 등 대규모의 수리시설이 축조되고, 또 23개를 헤아리는 기존의 중소 제언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되고, 화성부를 비롯한 아문둔전도 곳곳에 설치되는 추세에 있었다.38) 이러한 수리시설의 축조와 둔전경영, 그리고 농업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이앙법 중심의 수전농 경작체계가 주류를 이루고, 광작경영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그 문제점도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약적인 소농경영론자였던 우하영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앙법의 장점인 수확량의 증대와 제초회수의 감소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아니라 나농광작의 폐단, 곧 전체 농업생산력과 직결되는 토지생산성의 저하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천일록 에서 개선해야 할 농업론으로 거론한 당시 수원지방에서 행하여지던 나농과 광작의 페단은,
근래 민심은 힘써 부지런히 농사지을 계책은 하지 않고 오로지 광작하는 것을 농사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몇 식구 안되는 집에서도 모두 수석락의 논을 부친다. 그래서 畓主로 하여금 失利케 하고, 그 자신은 영리를 얻는다. 이는 참으로 요즈음의 큰 병폐이다.39)
라는 지적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앙법이 제초회수의 감소와 수확량면에서 선진농법임에는 틀림없으나, 흔히 광작경영으로 1회의 제초로 그치거나, 시비를 게을리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지력의 쇠퇴로 토지생산성을 떨어뜨려 농업생산력의 감소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그의 농업개선책은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지겸병과 광작경영이 비판받는 또 다른 이유는, “소위 겸병자는 1호의 농가가 數三戶分의 경작지를 倂奪하여 수삼호의 窮民을 경작할 땅조차 없게 만들고 만다.”40)는 지적
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소수의 戶에 의한 토지소유나 경작지 독점은 소농민층의 농민분해와 流民化의 큰 단서가 된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로써 우하영과 같은 소농중심의 노동집약적인 精農思想의 입장에서 보면, 토지생산성을 저하시키는 나농 광작자나 겸병자류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18세기 말 당시의 농업현실은 비단 신도시 화성지방 뿐만 아니라 타지역 농촌에서도 일반화된 현상이었으며, 토지겸병과 광작농의 성행으로 소농층의 토지이탈과 소농민간의 치열한 차지경쟁을 유발시켜, 정조대에 洪川유생 李光漢 등의 貸田論이 제안되는 계기도 되었다.
앞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우하영의 농업론은 자신의 향촌인 신도시 화성농촌에 대한 성찰에서, 그 입론이 비롯되는 등 지역적 특성이 짙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남을 비롯한 선진농업지역의 농업기술․농업경영을 항상 대비시키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 고장의 대다수 농민들의 생계를 걱정하고, 향촌과 나라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농업이론가로서의 실천적 의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저작 관수만록 은 移邑 후 행정․산업․성곽 축조 등 제문제를 향촌민의 시각에서 다룬 매우 귀중한 자료이거니와, 18세기 말 수원지방의 농업개혁을 위한 時務論도 이 책 여러 곳에 펼쳐져 있다.41)
조선시대에 있어서 국가재정과 산업의 기본토대는 물론 향촌사회의 주된 생산활동이 농업이었던 만큼 천일록 이 차지하고 있는 농학사상의 의의는 물론 지방사적 측면에서도 그 비중이 작다고 할 수 없다. 농학사적 측면에서 천일록 의 농업론은 15세기 시흥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의 농업기술체계를 기술한 금양잡록 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특히 18세기 말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의 농업형태와 소농중심의 농업경영론을 특징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다.
우하영의 농업론은 전국을 대상으로 그 시대 농업문제 전반을 포괄하고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수원을 중심으로 경기지역의 지방적 특성을 고려하면서 그 이론을 실제 농사현실에 적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적 특성은 농민경제의 안정화와 향촌사회의 발전이라는 측면이 고려된, 즉 향토애와 농민의식이 모든 立論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천일록 의 농업론은 농업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을 포괄하려고 하였다. 또한 입론의 주체를 소농민에 두고, 그 입장에서 농민생활의 안정을 기하고 새로운 농업기술과 합리적인 농업경영의 적용을 통하여 그의 시대와 향촌사회의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도모하려는데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보다 그 의미를 간추려서 말한다면, 우하영의 농업론은 노동생산성을 중시하는 가운데 토지생산성을 제고하려는, 즉 소농중심의 집약적인 精耕細作의 정농사상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상업적 농업론
18세기 말의 수원지방은 정조 13년(1789) 읍치를 옮겨 대대적인 신도시가 건설되고, 역사적인 화성 성곽이 축조되었으며, 화성행궁을 비롯하여 관아․객사․향교․군수고․창사 등과 민가․상가들이 서둘러 건축되고, 도로․교량․驛站․店幕․정자 등 대규모의 도시기반시설이 영건되었다. 뿐만 아니라 市廛과 남․북장시가 설치되고, 만석거 등 3대 제언이 수축되는 등 도시규모와 산업기반시설면에서 공전의 대변화와 도시적 발전을 거듭하였다.42) 화성부 주위에
는 남양․용인․양지․죽산․안성․이천․음죽 등 곡창지대가 점재되어 있고, 각 지방마다 5일장시가 속속 개설되면서 점차 수원은 중부권의 중심도시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특히 이곳 장시에는 쌀․어염․소․채소․담배․종이 등의 집산과 교역량이 많았다.
18세기 말 화성이 근대적 상업도시로서 발전하던 시점은 또한 전국 차원에서 상품화폐경제의 진전과 농업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먼저 쌀과 같은 주곡의 잉여생산물이 상품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수원부지역 내의 민인들이 돈을 마련하는 방법을 오로지 농곡에 있다. 농업 중에서도 가장 힘쓰는 것이 禾農이다. 그래서 시장에 나오는 것이 모두 쌀이다.43)
이것은 당시 수원 향촌에서 주곡인 쌀의 상품화가 대다수 농민들의 주수입원임을 밝힌 대목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화성부 외촌의 농업사정과 경제형편에 대하여 “농곡으로 돈을 마련하는 까닭에 촌간에서 빚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장리뿐이다”라고 밝힌 대목과 일치, 대다수 수원 향촌민들이 미곡의 일부를 시장에 내다 팔아 用錢을 마련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시기 농업생산 분야에서 변화발전의 큰 계기가 된 것은, 도시 주변 농민들이 채소․담배․고추 등의 작물을 재배, 이를 상품화하면서부터였다. 쌀의 상품화에 있어서 여주․이천지방 농민들은 올벼(早稻)를 재배하여 많은 소득을 올렸고, 용인에서 재배하는 인삼은 ‘龍蔘’으로 불려지면서 담배와 함께44) 중부지방 일대의 장시에서 널리 거래되었다. 수원의 도시적 발전과
함께 주변 농촌에서는 시장을 상대로 채소․담배․목면․마포․모시․양잠 등 상업적 농업을 專業으로 삼는 농가도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농작현실을 배경으로 우하영은 주곡 외에 배추․무․미나리 등 소채 같은 상업성 있는 농작물의 재배를 권유하는 등 상업적 농업의 필요성을 적극 권장하였다.
大城名都 등 사람은 많고 토지가 적은 곳은 그 資利하는 방법이 본래부터 허다하다. 수전으로 벼 10두를 뿌리는 땅에 미나리 2두를 심으면 전 10두락의 利를 획득할 수 있고, 한전으로 보리 10두를 심는 땅에 채소 2두를 심으면 맥전 10두락의 이를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근년 이래로 미나리와 채소를 싣고 府內 팔러가는 都下民人이 도로에 이어지고 있다. 대저 治圃․種芹을 업으로 삼는 자는 불과 10여 두락의 밭이나 불과 3, 4두락 논이면 5, 6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 보리나 벼를 농사하는 자는 수일경의 밭이나 10여 두락의 논으로도 4, 5식구의 식량조차 힘들다. 모두 흙을 갈아먹고 사는 것인데. 획득하는 利가 이렇게 틀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45)
이로써 ‘人多地狹’의 도시 근교의 농민들이 그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하여 벼 대신 미나리․보리․밀 등 도시민의 부식 수요에 알맞는 특용작물을 재배한다면, 작은 토지 경작조건하에서도 곡물보다 몇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상업적 농업의 장려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변화하는 시대현실을 수용하면서 대다수 소농민의 資生之方과 농촌경제의 진흥을 염두에 둔 소농중심의 농업관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우하영은 또한 자영농이 아닌 借地병작자의 경우에도 농작물의 선택 재배는 경작자의 자율에 맡길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민전의 경우는 물론 정조 18년(1794) 화성성역 기간에 수축된 장안문 밖 만석거의 수축과 함께 설치된 大有屯(北屯)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당시 화성부를 지주로 삼고 府의 외촌 농민들에게 주로 분급해 주는 관행을 개선, 신입한 성내 민인들도 둔전 경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경작조건의 확대를 제안하였다.
만약 전세를 가볍게 하여 작인들에게 주어 각자 편한 대로 작업을 하게 하고, 올벼를 심든 늦벼를 심든, 미나리나 무를 심든지 마음대로 경작케 하여 편의에 맡긴다면 백성들은 쉽게 따를것이니, 그것에 의하여 생업을 삼는 자는 1백 농가를 훨씬 넘을 것이다.46)
이것은 성내 농민들의 자활책도 될 뿐더러 그 재배작물의 종류도 그 資利에 따라 경작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소농민의 生利를 위하여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하였다.
우하영의 농가부업 또는 상업적 작물에 대한 필요성과 인식은, 양잠․목면․모시․생강․양봉․돗자리․닥나무․옻나무․대나무 등으로도 그 종류가 확대되었거니와,47) 다만 담배의 재
배에 대해서만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담배가 당시 對淸무역의 활발한 전개와 국내수요가 증가됨에 따라 그 재배풍조가 과열되어 있었으므로, 전국의 ‘良田沃土가 南草田化’하는 농업현실을 깊이 우려한 결과였다. 아무리 수익성있는 상업적 작물이라 할지라도 기호품인 담배의 과열된 재배로 인하여 농곡의 경작 면적이 감축되고, 아울러 곡물 생산도 감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바로 ‘禁煙草’의 이유였다.
상업적 농업에 적극적인 입론을 펼친 우하영이 다만 담배 재배에 대해서는 “일체 엄금하여 국내에서 그 종자를 永絶시켜야 한다”는48) 금연초론자가 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즉, 담배의 편중된 재배가 일용작물인 쌀과 잡곡의 생산을 감축시킨다는 논리 이외에도 당시 광작농의 확대로 소농층의 토지이탈이 가중되던 현실에 비추어보면, 소농 중심으로 집약적 농업경영론을 주장하고, 향약과 권농정책 등 농촌공동체의 결속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도모하려던 우하영의 농업진흥론의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견해라고 해석된다.
4. 신도시 繁榮策과 상업진흥론
1) 華城의 募民策
이읍과 화성 축조 후의 신도시 화성부가 상업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첫번째의 과제는 그 구성원인 府民을 募聚․충원하는 일이었다. 신도시 건설 초기부터 정부와 당로자들 사이에서 이주와 민생대책을 비교적 상세히 강구하는 가운데, 도시 번영과 발전을 위한 상공업자들의 모취와 육성책을 여러 경로로 논의한 바 있었다.49)
수원 향촌에서 이읍과 화성성역의 전과정을 목격했던 우하영은 자신의 지역사회가 신흥대도회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첫째 도시의 중추적 기능을 지닌 각 산업 분야에 종사할 민인을 먼저 모취하고, 둘째 읍민의 생활안정을 위한 민생대책 수립, 셋째 교육을 통한 주민교화 등을 신도시가 당면하고 해결해야 할 주요 급무로 꼽았다.50) 우하영은 民人募聚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화성을 樂土로 인식할 수 있는 도시환경의 여건을 마련하고, 각종 행정시책의 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신도시 건설 초기인 정조 13년(1789)부터 동왕 24년(1800)까지 정조는 11년간에 걸친 화성경영 기간에 화성과 용인․진위․안산․시흥․과천 등 인근 속읍민에 대한 신․호역과 환곡의 감면, 지방 초시에서 본시에 이르는 문․무과 별시의 시행, 품계의 加資와 賑恤 등 여러 가지 대민정책을 수시로 베풀었다.51) 이러한 대민 특별조치에 부수되어, 이읍 초부터 수원부 외촌이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避役의 무리가 적지 않았던 듯, 당시 우하영이 관찰한 대로 그들은 성내 주민들의 신․호역을 침해하거나 외촌에 도망하여 피역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었다.
이제 都下에 유입된 백성들을 살펴보면, 모두 8도에서 피역을 하고자 온 무리가 대부분이다. 지금 만일 本府에서 성내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허락하여 신․호역을 추궁하지 말기를 정하여 그 절목을 만들게 하고, 본부의 외촌으로부터 옮겨온 자로 하여금 각기 그 해당 부처에서 바로 부과된 역을 감면시켜 주며, 각 읍으로부터 옮겨온 자는 각기 그 거주하던 곳의 官으로 하여금 바로 그 소정의 역을 감면케 해준다면, 몇 해 안가서 성내에는 민호가 충만해질 것이니, 반드시 땅이 좁아 용납하기 어렵다고 탄식하게 됨이 있을 것이다.52)
이러한 부 관할하의 외촌이나 타지역 각읍에서 유입해온 민인들에 대한 피역대책은 당시 심각한 행정적․사회적 문제로 떠올랐고, 그 대책 또한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우하영이 피력한 피역대책의 요지는, 일단 부내로 이주해온 민호에 대해서는, 신․호역을 관장하는 해당 관부에서 일단 면역해 주는 방향으로 대민정책을 펼 것을 충고하고 있다. 그가 파악한 바로는, 留守府 승격 이후 부의 외촌민 일부는 비교적 裕民層임에도 불구하고 증액된 각종의 名色을 모면하고자 자신들의 향촌에서 유리된 것이며, 이는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부득이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무리들에 대해서는 이제 본래 각읍과 이주 전의 해당 관아에서 前歷을 묻지 말고 면역케 하여 부내에 安接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하였다. 우하영에 의하면, 우선 이들 무리들은 “형편에 따라 유도하여 성내를 채우는 일이 마땅하다”는 것이며, 성내의 閑曠處만 해도 약 1천 호를 채울 수 있는 까닭에 또다른 모민책을 쓰지 않아도 될 묘책이 된다는 것이다.53)
한편 우하영은 이러한 모민책과 함께 화성유수는 壯勇外使를 겸직하고 장용외영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으나, 그 중요성에 비추어 軍卒․吏卒들의 보급원이 매우 빈약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京營의 예에 따라 料布와 衣資를 지급해 주는 등 그 우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모민책으로서의 실효는 물론 유수영다운 위용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2) 산업진흥의 배경一市廛과 場市의 설치
정조의 對화성 읍민대책이 점차 실효를 거둔 결과, 당시 구읍치가 위치해 있던 龍伏面의 민호가 244호(인구 677명)였던데 비하여, 정조 14년 7월 신읍치에 이주해온 민호는 팔달산 기슭의 원주민호 63호를 포함하여 도합 719호에 이를 만큼 1년만에 증가된 민호는 3배에 달하였다.54)
또 우하영이 천일록 을 집필하던, 화성이 완공된 정조 20년(1796) 전후의 시기에 화성부는 성내 1천 호, 성외 1만 5천여 호의 민호를55) 거느릴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 상업도시․행정도시로서의 위용을 갖출 수 있었다.
신도시 수원을 상업도시로 육성․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상품유통거점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먼저 상인을 모취하여 廛房과 場市를 개설하고, 정부 차원의 상업활성화를 위한 진흥정책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읍 초기인 정조 14년 2월 좌의정 蔡濟恭에 의하여 상인 모취책으로 市廛과 장시 설치안이 제안되었는데,56) 이것은 바로 서울의 상업자본가 유치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이들 富戶․富商들에게 자본을 무이자로 대부하여 기와집 전방을 개설하려고 한 것은 바로 시장의 상설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畿輔의 大都會로서 신도시 화성의 도시적 면모와 번영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수원과 인근지방에 1월 6장의 5일장을 개설한다면, 수원부 중심의 장시의 상설화를 실현, 주민과 상인들이 스스로 모여들어 읍치의 상업적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 해 5월에는 수원부사 趙心泰에 의하여 수원 민인을 중심으로 상공업진흥을 위한 읍치 부양책이 제안되었다. 그의 의견은, 전국에서 부호를 모집하여 전방을 설치하자는 제안은 현재의 수원부 물산 형편으로는 어렵다고 보고, 우선 府民 중 자본이 있고 장사 물정을 아는 자를 선정, 그들에게 衙門에서 6만냥의 자금을 구획받아 3년을 기한으로 상업자금으로 무이자 융자해 준다면, 募民과 지역사회의 산업진흥을 위해서도 유효한 방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상인들에게는 廛名을 주지 않고 상업의 종류도 각자의 자유에 맡기자고 하였다. 이어서 조심태는 造泡寺인 龍珠寺 승려들의 생활이 빈곤하므로 이들에게 자금을 분급하여 종이와 신발을 만들게 하자는 즉 두부․종이․신발 등 수공업 진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출된 바 있었다.57)
아무튼 조심태의 수원민인 중심의 제안에 대해서는 채제공과 우의정 金鍾秀가 적극 동조함으로써 마침내 균역청 관하 賑恤廳의 돈 6만 5천냥을 대부받아 신도시 초기의 시전이 설립되고, 성내외에 남․북의 2곳 장시도 개설되어 상업활동의 거점으로 도시적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정조 14년 중반기부터 수원부 성내 官門 밖에 설치된 시전 各廛은 다음과 같다.58)
① 立色廛 …… 官門外路 북쪽에 위치. 각종의 비단을 진열.
② 魚物廛 …… 입색전과 通房되는 곳에 위치. 생선․과일 등을 진열.
③ 木布廛 …… 관문외로 남쪽에 위치. 白木․苧布․木花 등을 진열
④ 鹽及床廛 …… 소금․상 등을 진열
⑤ 米穀廛 …… 관문 밖 동쪽에 위치. 白米․南草․麵子 등을 진열.
⑥ 鍮鐵廛 …… 북리 店 중에 위치.
⑦ 棺槨廛 …… 미곡전과 통방되는 곳에 위치.
⑧ 紙鞋廛 …… 관곽전 아래에 위치. 정조 15년에 새로 건립됨.
이들 8개의 시전 상인들은 앞의 실록기사로 미루어 부사 조심태가 당초에 구상했던 대로, 장사 수완이 있고 상업자본이 가능한 여유있는 수원의 민인들 중에서 우선 선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각전들은 이읍초기의 사정과 내용을 기술한 수원부읍지 에 의하면, 정조 14년 중반기 이후에 ①~⑦의 전방이 설치되고, ⑧의 지혜전은 그 이듬해에 개설되었음이 틀림없다. 특히 이들 시전 가운데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진 것은 소금과 쌀을 취급하는 각전이었다. 이것은 이 고장이 서쪽으로 남양만을 끼고 있고, 동․남쪽으로 곡창지대가 위치해 있는 지역적 여건으로 인하여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시기 관의 절대적 지원을 받고 있던 이들 각전 상인들에게는 都賈행위를 허용했던 듯, 초기에는 미곡전 상인들의 米穀都賈로 인하여 이주해온 小民들의 失利가 자못 심하여 한때 이주민이 감소되는 등 부작용이 뒤따랐다.59) 그러나 수원은 화성성역
이 끝나던 정조 20년 국왕의 特敎로 장안문 밖에 良才驛을 옮겨 대규모의 迎華道와 驛站이 설치되고,60) 서울과 수원간의 園幸을 위한 신작로가 닦여지고, 정부의 對화성 상업육성정책 등이 주효하여 점차 서울 주변의 상품유통 중심지로 발전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3) 小商人중심의 상업진흥과 場市育成論
정조 14년 중반부터 시전이 설치되고, 정조 20년 화성 축성을 전후한 시기까지 城內外에 남․북장시가 개설되어 신도시 화성이 상업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춘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농업이론가로서 신도시의 건설과정을 지켜봤던 우하영은 坐販行商 등 상업활동으로 生利를 얻는 小商人의 보호와 상업의 육성을 통하여 도시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상업진흥론에 있어서도 보다 구체적이고 전진적인 관점을 피력하였다. 신도시 화성의 경우, 우하영은 民業을 발전시키고 募民策과 상업활성화의 방책으로 먼저 鹽商과 米商이 지역사정에 유리함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요목을 구체화하였다.
첫째, 부내 남․북장시 가운데 鹽利가 가장 큼을 들어 염상의 진흥․육성책을 이렇게 예시하였다.
지금 府下의 남․북장시를 보면 鹽利가 가장 크다. 남시장에서는 평시에도 每場에 매매되는 양이 항상 100여 바리(駄)가 되며, 만약 3․4월 장 담그는 때나, 8․9월 김장할 때면 하루 팔리는 것 이 거의 수백여 바리에 이른다. 지금 부내 민인으로서 염상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스스로 辦하고, 말을 장만하여 행상할 수 있는 자는 그 自辦에 맡기고, 진실로 자판할 수 없는 자는 각기 25兩을 주어, 본전으로 삼아 말을 장만하고 소금을 구해서 행상하도록 한다.61)
여기에서 우하영이 말하는 南市場(현 榮洞市場)은 남문 밖에 개설되어 城外시장이라 불렸으며, 北市場은 북문 안 북수동에 설치되어 城內시장이라 불리면서 각각 4일․9일과 2일․7일에 開市되던 5일장을 가리킨다. 이중 성밖 남시장에서 거래되는 소금만 하더라도 비수기에는 매장마다 약 200가마, 3․4월 장 담글 때나 8․9월 김장철 같은 성수기에는 거의 1천여 가마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소금이 남시장에서 많이 거래되고 있는 것은, 화성부는 서남쪽으로 어염이 풍부한 남양만을 끼고 있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품질좋은 天日鹽이 수원장시에 집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장시나 민인들에게 유통․소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62)
특히 우하영이 권장․육성하려고 하는 염상은 좌판․행상 등의 소상업자를 말하며, 이것은 소농․소상인층을 보호하고 資活시키려는 그의 일관된 민본주의적 시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소상업로서의 염상은 자본 능력 여부에 따라서 官에서 자금을 융통해 주되, 본전의 收俸은 장사에 일정한 경험과 요령을 얻는 기간인 3개월 후 매월 1냥씩 30개월에 걸쳐 분납케 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할 때 관에서는 1분의 利를 거두게 되고, 염상 역시 資生할 수 있어 상호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価販者가 많아지고, 그들이 장시에 전방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까지 외촌과 他關의 행상은 금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렇게 할 때 염상으로 나서는 읍민 100여 호의 生利는 보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배려를 하는 이유는, 府下민인은 지역사정에 밝아 외촌이나 타관의 행상들보다 편리하기 때문이며, 또 장사의 妙는 薄利多賣를 실천할 때 성공을 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63)
둘째, 부내의 상업을 활성화시키고 민인이 自利를 얻을 수 있는 방책으로 米商을 장려․육성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당시 수원지방 농민들의 主所得源은 오로지 곡식에만 의존하고, 그중에서 쌀이 主宗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현재 米商에 종사하며 再生하려는 무리가 많음을 고려, 부민중에서 미상을 희망하는 자를 모취하여 앞의 염상의 예에 따라, 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자에게 25냥을 대부해 주어 생업을 삼게 하고, 또 본전의 수납도 역시 3개월 뒤 매월 분납케 하였다.64)
셋째, 官錢을 빌려주는 일은 상업행위로서 부민의 生利를 보장하고, 부내 장시를 육성시키려는데 있는 만큼 대부에 따른 갖가지 부작용의 예방도 강구하고자 하였다. 관전을 활용하여 민인의 자활과 상업진흥을 꾀하는 일은 장려할 만한 일이나, 특히 각처에서 유입된 新入戶의 경우 失利하면 관전을 갚지 않고 도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우려의 소리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견에 따르면, “비록 新入流戶라 할지라도 능히 집을 지어 인접한 연후에 모취에 응하여 상업을 하기 때문에 25냥의 대부금 때문에 도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또 “府下에 5家作統制를 嚴立하여 그중 뿌리가 깊은 實戶로써 統首를 삼고, 전출입하는 자를 統首와 里任으로 하여금 보고케” 한다면 도망자는 고발되고, 만일 官債를 갚지 않고 도망하는 경우는 禁盜所에서 즉시 체포할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65)
우하영의 상업관은 앞의 상업적 농업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그 장려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 농촌에서 이탈된 소민층의 생계를 보장해 주고, 지역경제의 번영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염상․미상 등 소상인의 상행위도 그것이 일정한 궤도에 오를 때까지 동종의 타지역 상인의 활동을 금하게 한데서도, 그 지역적 특성과 향토애가 잘 드러나 있다.
4) 浦口상업의 진흥책-濱汀浦의 例
18세기 말 계획된 신도시로서 화성이 건설되고 상업도시로서 발전하기 이전, 경기지역만 하더라도 서울․개성은 말할 것도 없고, 안성 읍내장․광주 松坡場과 沙平場․양주 樓院 등은 수원에 앞서 상업과 시장기능이 훨씬 활성화된 곳들이었다. 이미 그 지역에는 상설적인 廛房이나 5일장과 같은 정기적인 장시체제가 틀이 잡혀, 농산물․수공업품․수산물 등 매우 다양화된 상품들이 큰 규모로 활발하게 교역되었다. 또한 이 시기 한강연안에는 전국을 상대로 하는 京江商人의 都賈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水上․陸上運輸 등 교통의 요지와 물화의 집산지에는 장시가 형성된 바 있었다.66)
한편 수원이 이읍 후 중부지역에 있어서 상품유통의 중심적인 상업도시로 성장하게 된 요인 중에는, 삼남의 요로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 외에도 정조의 정기적인 園幸을 위하여 신설․보수된 노량진과 수원간의 도로 개통, 迎華驛과 같은 대규모 역참의 개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조를 비롯한 정부의 적극적인 對화성 산업진흥정책이 크게 주효하였다. 그러한 조건 외에도 수원은 해안지역을 개발 활용할 경우, 보다 규모가 크고 편리한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서 발전․번영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즉, 신도시 화성은 전국 시장권의 중심지인 서울 남쪽의 副都로서 도시적 기능을 가진데다가, 서쪽으로는 품질좋은 魚鹽과 海藻類의 산지이자 해상교통로인 남양만을 끼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로 화성성역 당시 전국 각지에서 조달된 城材의 물자유통이 그곳 鷗浦 등을 통해 운송, 성역을 원활하게 끝낼 수 있었다. 즉, 성역 당시 목재․철물 등의 물자는 兵․防船, 私船 및 地主船 등 船運에 의하여 운송됨으로써 治木所로서의 기능과 함께 성재의 주요 집결지의 구실을 하였다.67)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해볼 때, 우하영이 자신의 향촌 부근에 위치한 남양만의 浦口 濱汀浦의 재개발과 번영책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것은, 포구상업에 대한 또다른 인식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을 요한다. 그는 먼저 상업․수산업의 교역과 해상교통운수 발달의 요지가 되는 곳이 배가 정박하는 포구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곳은 옛부터 水陸(항구)의 도회지가 되게 마련이라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신읍치 화성부로부터 30리 떨어진 지점인 남양만의 鷗浦 濱汀村 문제를 본격적으로 예거하였다.
(빈정포는) 이전에 富戶가 많이 살던 때는 錢貨가 넉넉한 까닭에 어선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각처 商賈에 판매되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점차 敗村이 되면서 부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 능히 船主人이 될 만한 업자가 없다. 때문에 해산물을 실은 상선들이 거의 옮겨가 陽城 瓮浦와 廣州 松湖(坡)에 정박하게 되니, 이는 사실상 구포에서는 부호로서 능히 선주인이 될 만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만일 府中 元居人 중에서 勤幹하고 사리를 아는 몇 사람을 택하여 선주인으로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구포 빈정촌에 나와 살게 하며, 넉넉히 관전을 대주어 물주로 삼고 그 선박이 와서 정박하는 대로 給價케 하고 船人을 상륙시켜 그들로 하여금 지체함이 없도록 해준다. 그리고 物種은 府中의 魚廛으로 운반하여 원근의 商賈들로 하여금 모두 판매케 한다면, 사방에서 소문을 들은 무리들이 반드시 雲集케 되어 포구의 큰 도회지를 이룰 것이다.68)
그에 의하면, 구포의 빈정촌은 옛부터 남양만의 유수한 포구의 하나로서, 수원을 중심으로 중부지방 일대에 어염을 비롯한 수산물 공급지의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특히 전성기에는 상선의 출입도 잦고, 자본을 갖춘 유력한 船主人들에 의하여 각처 魚商들과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하나의 도회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관수만록 이 집필되던 정조 20년(1796)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양성 옹포와 광주 송호(파)가 새로운 포구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元居 부호인 선주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점차 敗村窮巷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내 어전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포구 빈정포의 재개발과 새로운 번영은, 신도시 화성의 상업진흥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官府에서 어선과 뱃사람들을 정박시키는데 편리와 도움을 주는 제반 시설물과 자본을 갖춘 유력한 선주인의 상업자본을 유치하여 이를 육성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주요한 문제가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러한 요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해상운수의 역할을 담당하는 포구로서 빈정포의 기능을 먼저 회복시켜 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대체로 충청도 沔川 이북에서 경기도 인천 이남 수백여 리 사이에 상선이 정박하는 곳은 오직 옹포․빈정포․송호 세 곳뿐이다. 그러나 그 지세로 말한다면 옹포는 궁벽하여 한쪽 모퉁이에 있고, 오직 빈정포와 송호의 해문은 직접 통하니, 대상인들이 장사할 만한 곳이다. 또 경기좌도 각읍은 어염의 길이 모두 수원부중에 나아가니, 이제 만일 관전을 給債해 주어 선주인으로 하여금 빈정촌에 나가 머무르게 하고, 府校 몇 사람을 옹포와 송호에 파견하여 상선의 출입을 금하게 한다면, 그 형세가 자연 빈정포에 모여들 것이다.69)
즉, 그에 의하면 충청도 이북에서 경기도 인천 이남에 있어서 주요 포구는 옹포․빈정포․송호 세 곳인데, 그중 남양만의 빈정포는 어선․상선이 정박하기에 편리하고 상업자본가(선주인)들이 상업활동을 영위하는데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정적 조치를 취해서라도 빈정포에 상선 정박을 유도하는 정책을 편다면, 빈정포의 再価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더욱이 이곳은 시전과 장시가 개설된 府中과는 30리 거리에 위치해 있는 데다가, 당시 수원부는 경기․서울․충청도 등 중부권에 어염의 유통중심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빈정포를 再価시키는 것이 신도시 화성의 상업번영의 한 방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이곳의 포구상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어염을 타지역보다 염가로 판매․공급한다면, 각 지역의 상인들이 즐겨 모여들어 그 인식을 달리하는 계기가 된다고 하였다. 아무튼 우하영이 신도시 화성의 상업진흥책과 관련하여 수원을 비롯한 중부 내륙지방에 소금․생선․해조류 등을 유통․공급할 수 있는 중심지로서 빈정포라는 포구상업에 주목한 것은 매우 특기할 점이라고 하겠다.
5. 맺 음 말
조선후기 사회는 중세사회의 해체가 진행되는 가운데 근대를 향한 일대 변화와 전환기적 動因이 각 부문에서 태동하던 시대였다. 이 새로운 변화와 모색의 양상이 상징적으로 집약된 歷史像의 하나가 바로 계몽군주 정조의 주도하에 이룩된 신도시 화성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말 화성 신도시 건설은 개혁정치와 왕권강화, 문운의 융성을 아울러 추구하던 정조의 정치력과 문화의식을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지만,70) 이 시대를 살았던 향촌지식인의 對華城觀이나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時務論은 당시 향촌민의 입장이나 향촌사회 각 부문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데 매우 유용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글이 천일록 을 저술한 수원 출신의 醉石室 禹夏永의 방대한 저술 중 주로 화성 관련 부분을 논의에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며, 18세기 말 近畿實學의 학풍과 향촌사회관을 이해하는데도 일정한 의미가 있을 줄로 안다.
첫째, 18세기 말 대표적인 농업이론가의 한 사람이었던 우하영은, 農家總覽 , 田制 附農政․ 수원유생우하영경륜 등을 통하여 위기에 직면한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고 國富의 충실화를 기하려면 먼저 농업생산력의 증진이 필요하다고 보고, 務本意識의 고취와 강력한 권농정책을 역설한 바 있었다. 그는 이러한 권농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勸農官制의 활성화와 農官운영절목의 제정․시행을 요청하였다.71) 특히 그는 당시 향촌사회에서 일반화된 비생산적인 懶農과 遊手의 풍조를 국가적 차원에서 강력히 懲治하는 농촌통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해이된 향촌사회의 결속과 재흥을 위한 대안의 하나로 풍속교화와 상부상조의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농촌의 자치조직으로서 鄕約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조선후기 수원지방의 향약으로 거의 유일한 우하영의 「鄕約說」은 근기지역 향촌사회의 실상과 농업진흥 문제와 결부되어 그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고 하겠다.
둘째, 농업정책․농업기술․농업경영을 포괄하는 천일록 의 농업론은 경기지역, 그중에서도 수원을 중심으로 한 그 지역적 사정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17세기 말 이래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의 경우, 이앙법의 수전농 적용이 일반화되면서 豪富層의 토지겸병과 廣作의 확대로 인해 소농민의 분해현상을 향촌사회의 일대 위기로 파악, 특히 懶農廣作 현상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소농층의 토지이탈과 토지생산성을 저하시키는 나농풍조는 바로 대다수 소농민을 위협하고, 향촌사회는 물론 국가적으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관점에서 精農思想에 입각한 집약적 소농경영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과 신도시 화성이 상업도시로 발전하던 시점에서 상업적 농업의 필요성을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즉, 그가 천일록 도처에서 主穀 중심에서 미나리․무 등 도시근교의 채소농업을 권장한 것이라든지, 담배를 제외한 목면․인삼․생강․닥나무․대나무․옻나무 등 특용작물의 유용성과 상품화를 주장한 것이 그 예이다. 이것도 발전하는 시대현실에 대한 전진적인 관점과 함께, 소농의 입장에서 농민경제의 안정을 목표로 삼았던 그의 농업론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 그는 신도시 화성의 번영과 상업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상공업진흥 부분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인 관점을 드러냈다. 특히 그가 화성의 상공업진흥과 소상인층의 자활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강조한 薄利多賣의 보편적인 상행위 인식은 근대적인 시장원리에 접근한 것으로서, 重農的인 근기학파 실학의 충실한 계승자인 우하영의 상업관이 농업과 대립되는 측면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지역․가문․당색면에서 安山에서 학문을 영위하던 星湖의 학풍과 가장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업이나 수공업의 지나친 발전을 억제하고 금속화폐의 유통에 부정적이었던 선배학자 성호와는 달리 우하영은 상공업에 대한 보다 전진적인 관점을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즉, 그의 상업관은 소민층의 資生을 보장하고 사회적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補足的이면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는 보다 열려있고, 선진적인 현실인식의 징표임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것은 자신의 향촌사회가 지니고 있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 변화를 거듭하고 있던 18세기 말 신도시 화성의 도시적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는 상업진흥과 장시육성이 필수요건임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업관은 우하영이 관수만록 을 통하여 화성부의 남․북장시와 주변 5일장시에서 거래되는 어염과 미곡, 그리고 미나리를 비롯한 각종 소채 등의 특용작물이 한층 지방적․도시근교적 특성을 갖춘 상업적 작물임을 내세운 견해와도 일정하게 照應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화성 향촌사회의 발전을 위한 개혁적인 입론은 觀水漫錄 중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이 저작은 정조대의 화성지방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향촌민의 입장에서 향촌사회의 농업․상공업 등을 비롯하여 田制․환곡․軍制․城制․풍속․행정구역 개편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점에 대한 處方策으로서의 개혁론이 개진되어 있다. 특히 소농민․소상인․軍校․吏胥 등 소민층의 입장에서 향촌사회의 문제점과 개혁책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본론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입론들은, 예컨대 화성축조 방략에 있어서도 성읍으로서의 기능을 지닌 內城과 그 취약점을 보완하고, 방어와 공격성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外城의 필요성을 주장한 土築의 內․外城 築城方略論이 그것이다.72) 그밖에도 그는 화성성역 후 禿城의 撤移와 목장의 罷置를 통하여 군교․이서층의 料資를 마련하자는 제안, 민폐와 불편을 주던 화성의 夜禁制度에 대한 개선책, 田賦․환곡․신․호역 등 3정문제와 관련한 행정구역의 개편 문제, 둔전의 설치 운영에 대한 개선책, 화성부로 藥丸移貢을 해야 한다는 논의, 補軍庫와 補民庫의 운영에 대한 개선책 등 18세기 말 신도시 수원사회가 당면했던 제문제에 대한 실로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시무론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성 성곽과 壯勇外營의 설치 등 군사도시로서 비중이 컸던 이 고장의 수공업 진흥을 위해서 화약과 鉛丸의 貢物을 화성부로 옮겨야 한다는 제안은 매우 인상적이다.73) 이읍 초기부터 수원의 수공업 발전을 위하여 4천 냥의 금융지원을 통하여 製紙의 선진지방인 安城의 紙匠을 유치,74) 종이 생산을 활성화하려 했고, 실제로 정조대 중엽 이후 이 고장은 종이 생산을 담당하던 造紙所가 龍珠寺․紙串里․紙所洞에 설치되어, 닥나무의 재배도 본격화되었다.75) 수원의 이러한 제지 수공업은 수원부의 시전인 紙鞋廛이 설치되기 전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 같다. 우하영이 建都 附山川風土關扼 등에서 특용작물인 닥나무의 재배를 거론하고 있는 것도 당시의 이러한 수원지방의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